‘티파니’와 ‘뉴키즈 온 더 블록’ 공연 다시 소환해 보니
1989년 필자가 안양경찰서 경비과장 때 ㅅ레코드회사가 기획한 ‘티파니 내한공연’이었다. 솔직히 팝에 관심이 없던 필자는 티파니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미 기획사에서는 안양공설운동장을 대관해 놓고 있었다. 때마침 한 종교단체에서 마이클잭슨 초청 내한공연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잠실운동장은 이미 대관이 예약된 상태였다. 다급해진 ㅅ레코드사는 하는 수없이 장소를 안양공설운동장으로 잡았다. 남태령만 넘으면 서울이니까 지리적 근접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레코드사 관계자를 불렀다. 그는 이 공연이 팝음악계의 일대 사건이라는 투의 설명만 늘어놓았다. 당시는 민간의 콘서트 같은 “수익성 행사는 자체 경비 등을 책임지고 해야 한다”는 원칙도 서 있지 않았다.
혼잡경비는 잘 해야 본전
관객을 2만명 정도로 예상한다고 했다. 그것도 야간에…. 머릿속이 아득했다. 경험은 없었지만 ‘혼잡경비는 잘해야 본전이다’라는 금언이 떠올랐다. “경찰의 지시를 제대로 따라야 합니다. 사고가 나면 큰일이니까요.” 생각 같아서는 공연을 취소하도록 하고 싶었지만 이미 해외에서 계약까지 끝내고, 방송스케줄까지 잡아 놓은 상태였다.
공연기획자는 쉽게 대답하고 돌아갔다. 고민은 깊어졌다. 야간에 2만명이 모이는 공연을 어떻게 무사히 치러낼까. 경비 담당과 둘만의 고민이었다. 이 행사의 심각성을 경찰서장에게 보고했으나 대수롭잖게 여겼다. ‘그건 경비과장이 알아서 하면 된다’는 투였다.
우선 참고할만한, 과거의 대형 이벤트를 찾아보니 ‘국풍81’ 행사가 컸다. 관할했던 영등포경찰서로 담당자를 보냈다. 돌아온 직원의 보고는 “정말 잘해야 경찰은 본전이다. 무엇보다 공간 확보가 중요하다”였다. 준비는 진행되었다.
안양공설운동장 바닥을 바둑판처럼 줄을 긋고 사방팔방으로 통로를 확보한 상태로 관객을 앉히고, 특히 중계카메라 근처는 공간을 더 띄웠다. 말 안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나무 장대 2트럭을 담양에서 실어왔다. 원시적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공연일이 가까워오며 이 공연 혼잡경비를 참모회의 때 보고하자, “에이, 경비과장 너무 엄살 부리는 거 아냐?” 서장의 농담조 논평에 다른 참모들은 함께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 이제 순전히 내 책임이구나.’
가슴이 떨리고 답답했다. 경기경찰청에서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기동대도 여유가 없으니 1개 중대만 주겠다는 거였다. 하는 수없이 담당자에게 봉투까지 보내 로비한 끝에 간신히 1개 중대를 더 받았다.
티파니가 어떤 물건인가 좀 더 알아보았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세계적인 배우로서 활약하고 있는 시대에 세계 팝계에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와 함께 어깨를 겨루는 세계적 아이돌 스타였다.
더구나 첫 내한 공연이었다.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 공연, 부산 사직체육관 공연, 서울 하얏트호텔 공연까지 줄줄이 ‘1회 최대 내한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획사는 야간에다 야외공연인 관계로 홍콩에서 최신 초대형 음향설비를 가져와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요즘말로 대박을 낼 기세였다.
어디선가 불길한 풍문도 들려왔다. 해외 순회공연에서, 특히 개도국에서 공연하는 경우, 적당한 불상사가 날수록 빌보드차트의 인기가 올라가기 때문에 은근히 그런 상황을 유도한다는 얘기까지 그럴듯하게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최악의 순간, 조명탄을 쏴라
최악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2만명 관객이, 그것도 한밤중에 흥분의 도가니에 몰입한다. 그러다가 뒤에서 밀면 앞에는 압사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대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앵글을 안 세울 수도 없었다.
경찰관들을 맨 앞열에도 배치했다. 기획사측은 공연의 그림이 좋지 않다고 극구 반대했지만 그래도 20명을 앞에 앉혔다. 그들의 임무는 무대로 밀리는 관객을 방지하는 일이었다.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면 어떡한다? 나는 주최 측에 단호한 제안을 했다. 폭죽을 준비해라. 진정한 축제가 되려면 폭죽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내 계획이 숨어 있었다.
폭죽을 준비하면서 대낮같이 밝아지는 조명탄 20발을 준비시켰다. 주최측은 그게 무슨 용도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M방송사의 자회사인 음악방송이 녹화중계하기로 결정되었다. 생방송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공연을 중단시키는 일 뿐이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들여 하는 공연을 주최측이 스스로 중단하는 일을 기대할 순 없다. 최악의 사태는 어떡하든 막아야 했다. 두 가지 방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했다.
첫째는, 음향차단 팀을 준비했다. “너희는 내가 ‘차단’이라고 무전을 치면 바로 음향의 메인스위치의 전원을 꺼버려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둘째는, 폭죽 팀이다. “음향이 꺼지면 장내가 혼란스러울 거다. 그때 내가 ‘발사’하면 바로 조명탄을 쏘아 대낮처럼 만들어라. 그리고 공설운동장 라이트 시설을 모두 밝혀라.”
공연 하루 전날인데도 벌써 안양공설운동장 앞에서 밤을 새우며 줄을 서는 청소년들이 생겨났다. 일몰이 되고 어둠이 내리자 관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운 관객이다.
완전한 어둠이다. 1만5000여명 추산의 관객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음향은 대단했다. 가만히 있어도, 팝을 몰라도 흥이 절로 돋는다. 그런대로 공간을 띄워 유지되던 관객 대열이 앞에서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현란한 조명과 음향에 뒤에서는 맨 앞쪽의 상황을 그냥 흥분한 관객의 열광 정도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뒤에서 대기하던 전경들마저 어깨를 들썩이며 공연에 취해갔다. 앞에 있던 경찰관과 전경들이 뒤에서 밀려온 관객들에 깔린 사람들과 앵글에 끼인 사람들을 업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는 기사가 구경을 하느라 어디에 있는지 바로 수배도 되지 않았다. 마침 소방파출소가 공설운동장 안에 있어 부상자 일부는 소방차 물탱크 지붕에 눕혀서라도 병원으로 호송하도록 지휘를 했다.
공연은 계속되었고, 흥분의 열기는 더 높아만 갔다. 심지어 뒤에서는 무대 앞쪽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뒤쪽에 앉았던 사람들도 일어서서 함께 춤을 추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무대 쪽에서는 계속 해서 사람이 깔려 넘어지는데도…. ‘아, 이렇게 압사사고가 나는구나.’
음향 차단을 지시했다. 갑자기 음향이 끊겨버리니 아우성이다. “조명탄 발사!” 순식간에 공연장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아우성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현장을 녹화하던 중계팀도 당황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병원으로 옮긴 관객들은 괜찮을까. 사망자는 없어야 할 텐데… 아득했다. 공연이 중단되어 아쉬워하며 관객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할 때에야 경기경찰국에서 다급하니까 지원해준 기동대가 도착했다. 경찰 유관단체의 저녁자리에 참석했다가 소식을 들은 경찰서장도 부랴부랴 달려왔으나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었다.
최종 통계는 중상 8명, 부상 30여명이었다. ㅅ레코드사는 그 후로도 한동안 치료와 보상문제로 골머리를 알았으나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2년 2월 17일 ‘뉴키즈 온더블록’ 초청 내한공연을 기획했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무대 가까이 접근하려던 박모(18세) 양이 압사한 것이다. 그것도 실내행사에서 1800명 정원에 3200명 관객을 집어넣고 발생했다니 말이다. 더 한심한 것은 저녁 7시30분에 시작된 공연에 부상자가 속출했는데도 중간에 3시간을 중단했다가 다시 공연을 속개하여 자정을 넘겨 0시35분까지 진행했다. 결국, ㅅ레코드사 대표는 구속되고 회사는 부도에 이르게 된다.
생각만 해도 티파니 안양공연은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때 아무도 모르게 공연을 중단시킬 조명탄을 경찰의 최후 수단으로 준비했던 것은 대견하기까지 하다.
“혼잡경비는 잘해야 본전이다”
지금이야 ‘수익자부담원칙’이란 대전제가 인식되어 있지만 그래도 경찰은 책임의 담장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간신히 피해 간다고 해도 어떡하면 경찰을 그 책임에 연루시킬 건더기가 없을까 눈을 부라리며 달려드는 것이 세상이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상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상사가 모든 것을 지시하고 책임져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 책임이라 여겨야 현장의 해법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