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 칼럼] ‘부마항쟁’ 43년···민심 떠난 정권의 말로

부마민중항쟁

“1979년 10월 16일/마침내 불꽃은 치솟았다./우리들의 불꽃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되어/거리와 골목/교정과 광장에서/민중의 손에 들려/노동자와 농어민/도시 빈민과 진보적 지식인/학생들의 손에서/거대한 불꽃으로 불기둥 되어/하늘을 찌르며 타올랐다…”

임수생의 ‘거대한 불꽃’이라는 시입니다. 1979년 10월 16일 거대한 불꽃이 치솟은 곳은 부산입니다.

오늘은 부마민중항쟁기념일입니다. 1979년 10월 16일 오늘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됐는데, 국제신문 기자인 임수생 시인은 민중항쟁에 앞장섰습니다. 시집을 낼 때마다 정보기관에 끌려갔던 임 시인은 부산일보 기자였던 1987년에는 6월 항쟁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1989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결성해 송기인 신부와 함께 공동회장을 맡았습니다.

부마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킨 건 폭주하던 유신독재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었습니다. 유신체제에 대해 이미 시민은 이미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고를 보냈습니다.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인 77명의 유정회 의원을 포함해 원내 안정의석을 차지했지만 공화당 득표율 31.7%는 야당 신민당 득표율 32.8%보다 1.1%나 적습니다.

유신체제에 대한 시민의 반발과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거세진 반독재민주화 투쟁은 야당인 신민당에도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이철승 대표가 물러나고 김영삼 의원이 총재가 됐습니다.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유신 체제 안에 안주하던 신민당이 반유신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정부와 야당이 맞붙은 첫 번째 사건은 경찰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YH사건’이었습니다.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중심이 되어 강경야당과 김영삼 총재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법원은 김영삼 총재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인용하고 직무대행까지 지정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김 총재가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미국에게 요구했습니다. 빌미를 찾던 유신정권은 이를 꼬투리 삼았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고, 가택연금까지 됐습니다. 민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의원직 제명에 항의해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 3명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습니다.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가 ‘사퇴서 선별수리‘를 거론했습니다. 시민 분노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됐습니다. 부산과 마산 지역의 민심이 동요했습니다.

드디어 10월 16일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전날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나왔고, 10월 16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며 반정부시위를 벌이다가 저녁 때 학교 밖으로 나섰습니다. 김영삼에 대한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반정부시위에 시민들이 하나둘씩 가담했습니다.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10월 17일 더 많은 시민 학생이 반정부시위에 참여했고,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충무파출소 한국방송공사(KBS)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이 파괴되었고, 경찰차량이 부서지거나 불탔습니다. 강경진압을 결정한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했습니다. 1,058명이 연행되고 66명이 군사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지만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었습니다. 18일과 19일에는 경남 마산시와 창원시에서 시위가 벌어져 민주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 등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했고, 정부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습니다. 며칠 뒤 10.26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습니다.

10.26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12.12로 신군부가 차지했고, 곧 5월 광주민중항쟁이 벌어지면서 부마항쟁은 역사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반유신·반독재 민심이 폭발한 부마항쟁은 정권 내 갈등을 부추겨 유신체제가 안으로부터 스스로 무너지는 계기였습니다. 부마항쟁은 민심이 떠난 독재정권은 긴급조치나 공포정치로만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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