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 칼럼] 2019년 칠레와 레바논 반정부시위의 교훈
2019년 10월 25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칠레의 총인구는 1950만명, 산티아고 인구는 790만명인데 시위에 참가한 시민이 120만명이 넘었습니다. 칠레 역사상 최대 규모 시위였습니다. 산티아고 시내 곳곳에서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시위를 벌였고, 가족 단위 참가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칠레 정부는 이미 10월 19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야간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시위는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됐지만 군을 동원해 강경진압에 나섰습니다. 전날까지 공식 사망자만 19명이었으며 수백명이 다치고 수천 명이 체포됐습니다. 강경진압에도 시위는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심해졌습니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시위가 벌어지게 된 계기는 사소했습니다. 10월 6일 칠레 정부가 유가 상승과 칠레페소화 가치 하락 등을 이유로 지하철 요금을 인상한데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지하철 요금은 30칠레페소, 우리 돈으로 약 50원 정도가 올랐습니다. 10월 7일 고등학생 등 청년들이 앞장서 시작된 시위는 사회 불평등 해소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습니다.
지하철요금 인상 항의가 임금 인상과 연금·의료보험·교육개혁 요구로 바뀌었고, 마침내 대통령 사퇴, 경제개혁, 내각 교체 등 전면적 변화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발단은 지하철요금 인상이었지만 중도우파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이 무능해서 시민들의 삶이 어려워진데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실패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던 겁니다.
피녜라 대통령은 2010년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후임 미첼 바첼레트는 2006년 당선된 칠레 첫 여성 대통령인데 피녜라에게 떨어졌다가 재대결에서 이겨 두 번째 대통령이 됐습니다. 피녜라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건 경기침체와 자녀들의 부패 문제 때문에 바첼레트 대통령 지지자들이 분열됐기 때문입니다.
10월 24일 피녜라 대통령이 부랴부랴 전기요금인상안 철회, 기초연금 인상, 최저임금 인상, 의료비 부담 완화 등의 정책을 발표했지만 시위를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정치·사회적 위기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첫 번째로 피노체트 군사독재정부 때 제정된 1980년 헌법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2020년 10월 국민투표에서 시민 77%가 동의했습니다.
2021년 5월 새 헌법을 쓸 제헌의회가 구성됐습니다. 2021년 12월 당선된 학생운동가 출신 35세 극좌파 보리치 대통령은 독재 청산을 약속했고, 새 헌법 초안에 신자유주의 타파, 환경, 성평등, 의료보험 개혁, 원주민 지역 자치 인정 등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올해 9월 4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새로운 진보적 헌법 초안은 시민 62%의 반대로 부결됐습니다.
우파는 너무 급진적이라는 가짜뉴스와 허위정보로 새 헌법 초안을 흔들었습니다. 예컨대 원주민 지역의 권리 보호는 국가 분열로, 평등은 개인권리 침해로 비판받았습니다. 제헌의회는 서서히 시민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연평균 13%의 인플레이션으로 시민의 삶이 어려워졌습니다. 코로나19 대응에 매달리느라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산티아고 120만 시위와 비슷한 일이 비슷한 시기에 레바논에서도 있었습니다. 레바논 정부가 스마트폰 메신저 와츠앱에 세금 230원을 부과하기로 결정하자 반정부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시위 2주 만인 10월 29에 사드 하라리 총리가 사퇴했고,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 지지로 하산 디아브 총리가 취임할 때까지 석달 동안 무정부상태였습니다.
사태의 발단은 와츠앱 세금 230원이었지만 시위가 시작되자 칠레와 마찬가지로 악화된 경제와 사회갈등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