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흰 철쭉’ 박노해
이 땅의 봄의 전위,
진달래가 짧게 지고 나면
긴 철쭉의 시절이다
화려한 철쭉은 향기가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흰 철쭉에서만
이리 청아한 향기가 나는 걸까
4월에서 5월로 가는 아침에
하얀 얼굴에 이슬관을 쓰고
가만가만 내게로 걸어오는 너
의로운 벗들은 진달래 꽃잎처럼
붉은 피를 흩뿌리며 앞서갔는데
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이리 무거운 침묵의 걸음인데
진달래 서러운 가슴에
백합의 향기를 머금은
흰 철쭉꽃이여
그 모든 화려한 빛깔을 다 여읜
순백의 얼굴로 와서 아무도 모르게
내 첫마음의 수갑을 채우는 것이냐
이리 희고 맑은 향기로
나를 붙들고 나를 울리느냐
어쩌라고 나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