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내 발자국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박노해
나의 눈물이
나 하나의 슬픔이라면
그만 울어도 좋으리
나의 분노가
나 하나의 것이라면
그만 끝내도 좋으리
홀로 길을 걷다가
문득 울리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
걸음을 멈출 때
3월의 아침길을 걷는 내 앞에는
낡은 총을 든 항일 청년의
붉은 발자국 소리가
어둔 골목길을 걷는 내 옆에는
스무 살에 투쟁 속에 죽은
친구의 발자국 소리가
비틀거리며 걷는 내 등 뒤에는
지구 위를 떠다니는 피난민과
맨발의 아이들의 작은 발자국 소리가
이 세상 어디에도 나를 위한 곳이 없다는
긴 한숨의 발자국 소리가
세상 끝으로 내몰린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오늘도 내가 걷는 이유는
내 힘든 발자국 속에
수많은 발자국이 포개져 있어
나 혼자 걸을 때조차
수많은 다른 발자국들이
나와 함께 걷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