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버팀목 돼주셨던 김판영 외당숙
첫돌 전에 어머니를 잃고 나는 외가를 모른 채 자랐다. 친구들이 외가집 다녀온 이야기, 외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은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어느 먼 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어머니 네 자매는 아들 손이 없이 딸만 오롯했고 어머니는 그 중 맏이였다. 하지만 병약해서 전쟁 중에 나를 낳으신 후 시름시름 앓다가 마흔 셋에 돌아가시니 달성 현풍 못골의 외가는 절연된 고장이 되고 말았다. 이모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어디 사는지 연락조차 두절되고 오로지 대구 둔산동 옻골 이모만 유일하게 연결이 되어 중학교 시절 그 이모댁을 종종 놀러갔다.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 나는 이모 품에 일부러 안겨 응석을 부리며 “엄마~”라고 불러보기도 했다. 그 옻골 이모가 당신의 사촌동생 김판영(金判永) 당숙아저씨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1970년대 경북교육감을 지냈고 80년대에는 문교부 차관까지 오르셨던 서흥 김씨 문중의 우뚝하고 자랑스런 기둥이셨다. 한 번도 뵙지 못한 당숙 어른께 편지를 드려서 마음의 연결이 된 뒤로 틈만 나면 내 편지에 답을 보내주셨다. 안부와 걱정과 염려와 성공의 각별한 기운까지 혹은 인생의 지침까지 정성껏 보내주셨다.
늘 하시던 말씀은 “네가 비록 연안 이씨지만 절반은 서흥 김씨란 사실을 잊지 말아라”고 하셨다. 큰 학자이셨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외손임을 늘 가슴에 명심하라고도 하셨다. 서울의 댁으로 두어 차례 찾아뵙기도 했다. 만년에는 실명(失明)을 하셔서 방안에서도 벽을 더듬어 힘들게 다니신다는 안타깝고 슬픈 소식을 들었다.
2015년에 돌아가신 전갈도 듣지 못해 마지막 인사도 올리지 못한 그 마음이 아프다. 늘 빛나고 훤칠하고 이지적인 용모로 삶의 올바른 좌표를 엄중히 일러주시던
외가댁의 소중한 어른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이젠 외가댁 문중이 더욱 외딴 섬처럼 멀어졌다. 뒤늦게나마 명복을 빌며 구천에 계신 당숙어른께 두 번 절 드린다.
李 東 洵 博士 淸案下
벌써 만추(晩秋)인가 보네. 중부 산간에는 얼음이 얼 것이라고 하니 참 덧없는 세월이 아닌가!
장래가 양양한 젊은이들에 있어서야 가을이 가면 또 다른 계절 겨울이 오고, 해가 바뀌면 꽃 피는 새봄이 올 것이지만 나이도 한 70년이면 똑같은 계절의 변화인데도 자연의 모습을 감상하는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성큼성큼 다가온다는 마음으로 정돈되지 않은 신변사에 초조하고 남겨놓은 것 없는 지난날들이
서글프게만 생각될 뿐이네.
君이 보내준 사진과 시집까지 틀림없이 받았으며 고마운 마음 헤아릴 수 없었네.
君의 외조부는 바로 나의 종숙(從叔)으로서 내 손으로 염습을 해드리고 말 그대로 내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루었으며 그 뒤 근 10년을 작은 집 네 분의 기제(忌祭)를 나의 집 삼대 대주(大住)와 함께 내가 모셨는데 외손으로서 혈손(血孫)도 있다면서 기어코 밀양으로 칠계(漆溪)로 옮겨가면서 모시게 되었으니 지난 일이긴 하나 그 죄송함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가난한 백면서생(白面書生)과도 같았던 20대 후반의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가슴이 메이는 듯 혈손 없는 이의 비애가 이러한가를 몹시 슬프게 생각하고 또 부끄럽게도 생각해왔다네.
그런 숙제가 이번에사 풀렸으니 외손이긴 하나 혈손으로서 제군들이 합심하여 잘 모셔드려 유한(遺恨)을 풀게 해드리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네.
아직도 생활전선을 몸소 뛰어야 하는 신세인데다 요즘은 신경통이 고질화된 데다
환절기면 으레 겪어야 하는 감기와 특히 기관지염으로 얼마 동안을 혼자 앓다가 보니 군에게 답장도 쓰지 못했고, 더욱이 오명근 박사댁 경사에 축전보내는 일조차 잊어버렸으니 이제 서서히 정상적인 사회생활 대열에서도 낙오되기 시작한 것 같게만 느껴지네.
비록 수하(手下)가 있긴 하지만 매일같이 날아드는 경조(慶弔) 축전까지 내가 우 체국에 가서 손수 처리해야 되니 그 괴로움도 여간이 아니네. 답신 늦어진 안부 여쭙더라 전해드리게나.
추호라도 자만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연구에 몰두, 한 길 한 방향에서 크게 이루길 바라며 아무리 친구가 좋다 할지라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법이니 문인이 빠지기 쉬운 감상과 감격에 조심하고 뛰어난 작품을 남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네.
비록 부질 없는 노파심이지만– 환절기인지라 건강에 각별히 주의하기를 비네.
1991년 10월 20일
金 判 永 書
* 정영근 교수 소식이 궁금하네. 그 무심한 사람이 재종자형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소식을 끊어 궁금하네. 잘 지내는지?
2022 스승의날을 맞이하여 인천교육대학 김판영학장님 성함으로 검색하다가 이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조카님께 보낸 친필을 보니 학장님으로 계실때 뵌적있는 필체시네요…교육자로서의 따뜻하고 멋진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연히 네이버에서 외조부님 관련 내용을 찾다가 블로그를 보고 들어왔는데 외조부님의 친필 편지를 보게 되어 너무 반가운 마음에 글을 남깁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외장손으로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둘째 딸이십니다.
지금은 중국북경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와 촌수가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겠으나 외할아버지의 기억을 이런식으로 찾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외조부님을 기억하게 되셨다니 참 좋습니다. 이런 기사를 더욱 많이 발굴하여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시아엔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