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자유시’ 동인 기자출신 시인 서원동

서원동 시인과 시집 <쉰일곱편의 비가>

흘러간 70년대 시절, 한때 “반시”와 “자유시” 두 동인지에 동시참여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만 선택하게 되어서 거주지 중심으로 “자유시” 동인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심정은 “자유시”보다 “반시” 쪽이었다.

나의 작품성향이나 문학적 친교(親交)가 “반시” 쪽이 훨씬 마음이 쏠렸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자유를 지향한다’라는 “자유시”의 창립선언문에서 거론하는 자유는 그 성격이 모호하고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전혀 없다. 다만 개인의 자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였으니 그것은 방향성이 부재하는 개인성의 강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작품을 모아서 앤솔로지를 발간했고 제각기 쓰고싶은 작품을 모은 단순 사화집(詞華集)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서 “반시”는 어떤 문학적 에꼴을 표방했고 그것은 다분히 당대 사회의 억압성,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색조가 들어있었다.

“자유시” 동인들은 그냥 자주 만나 밤 깊도록 술 마시고 노래하며 풍류를 즐기는
단순한 우정과 친교의 자리가 많았다. 두 동인지가 각각 7집까지 잇달아 발간되었다. “자유시” 동인지 제작은 거의 대구에서 발간했지만 선집(選集)은 서울 전예원에서 나왔다. ‘도베라’는 속표지를 가리키는 일본어이다. 당시 출판현장에서는 이런 용어가 그대로 쓰였다.

서원동 시인 캐리커처

이 편지의 주인공 서원동(徐源東, 1950~ )은 “자유시” 동인 멤버로 2집부터 참가한 인물이다. 경남 창녕 출생으로 대구대 교육과를 졸업했고 국제신문 기자, 엔터프라이즈 편집장, 부산매일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21세기 문학” 편집주간을 맡았다.

다년간 서울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구미로 내려왔다. 1977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들꽃’, ‘봄꽃은 지고’ 등으로 데뷔했다. 시집으로는 “우리들의 왕”, “꿈속에서 꾸는 꿈” “쉰일곱 편의 비가” 등이 있다. 서울생활의 첫 시작은 어김없이 여성잡지의 편집기자로 박봉에다 분주한 일과로 정신 없이 바쁜 세월을 보내었다.

편지의 문맥에는 서울생활의 고독, 고달픔 따위가 솔직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가 일단 서울에 있었으므로 선집 발간과 관련된 제반 연락은 모두 서원동이 도맡아서 보았다.

사실 그의 본명은 서해동(徐海東)이다. 하지만 평생사주와 작명을 잘 본다던 문청시절 친구 윤우현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다. ‘바다 해’보다는 ‘근원 원’을 필명으로 써야 이름을 떨치고 크나큰 공명을 이룬다고 했다. 그가 과연 개명(改名) 덕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서원동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李 東 洵 兄,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부인도 잘 계시고 아이도 잘 자라겠지요?
저는 이곳으로 도망온 지 1년이 가까워오는데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그리고 지난 해 9월, “주부생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런 생활을 얼마나 더 해야 될런지 그저 막막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사람은 만나기 싫고 어느 행사나 단체에도 어울리기 싫어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가곤 합니다. 이따금 정호승씨와 심만수씨 등은 만납니다.

어제 오후 출판사 전예원에 가서 우리 동인 시선집이 어떻게 되었는가 알아봤습니다. 전예원 김진홍 사장 말씀은 대학이 개학하는 때에 맞추어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합디다.

그리고 동인들 각자의 사진 한 장 씩을 모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얼굴만 도베라에 일렬로 내세울 작정이랍니다. 그쪽의 주문으로는 증명사진과 같이 딱딱한 것이 아니라 옆 모습이든 무엇이든 특색있는 사진이 좋다고 하더군요.

다른 동인들께는 제가 이태수 형께 전화드려 연락하겠습니다. 언제든 모두 한 번 모여 술 마시고 실컷 떠들었으면 합니다. 좋은 글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1982년 2월 10일

서 원 동 드림

서원동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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