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세계 핵질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를 믿었던 것이 어리석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TV에 나왔다. 우크라이나는 동서냉전 해체 당시 미국, 소련에 이어 1800개의 세 번째 핵 강대국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에 따른 핵무기 조정으로 안전보장각서를 믿고 1996년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겼다.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을 믿은 것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상황에서 이 안보구조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핵 비확산조약(NPT)에 1975년 4월 가입, 86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NPT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 핵보유국 이외의 국가로 핵이 확산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핵보유국이 되었지만 미국 내 유태인의 독특한 위상으로 문제 삼지 않았고 인도, 파키스탄은 중국과의 대치로 건들기 어려운 기정사실이 되었으며, 남아연방의 핵은 흑백분리를 풀고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해체했다.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하였으나 국제원자력기구(IEAE)의 특별사찰에 반발하여 2003년 탈퇴를 선언하고 2006년 핵보유국이 되었다. 북한도 핵을 갖고서는 국제사회, 특히 미국에 거슬리고 살기 어려운 것은 잘 안다. 한국이 이보다 10년 전 핵을 만들려 했던 박정희 정부에서 1975년 NPT에 가입한 것도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은 아프간전쟁에서 작년 철수했다. 따라서 해외 파병은 미국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아프간전쟁은 해선 안 되는 전쟁이었다. 19세기에 대영제국, 20세기 소련도 패퇴하여 돌아온 전쟁이었다. 21세기 미국이 돌아 온 것이 당연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이 우크라이나에 가지 않는다는 것만 되풀이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진입로에 미군 1개 여단만 가로막고 서도 러시아군은 돌파하고 들어오지 못한다. 미군의 존재는 상징이다. 실제 병력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장수의 기세 싸움이다. 이것이 전투, 전쟁의 본질이다.
8.18도끼만행 작전의 한국군 반격에 북한은 압도되었다. 이를 밀고나간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를 시행한 박희도 공수특전단장의 기세였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미군의 압도적인 공중지원이었다. 휴전 후 처음으로 김일성은 유엔군에 사과했다. 미국이 이렇게 강력히 나왔던 것은 미군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시체도 적진에 남기지 않고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전통이다. 많은 전쟁영화에서 볼 수 있다.
부다페스트 각서는 부족했다. 국제정치학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안보에 안심한 이유다. 부다페스트 조약을 맺을 때는 소련이 해체될 당시였다. 지금 푸틴은 소련을 부활하려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본래 러시아와 다른 독립국이었다. 대러시아는 러시아, 소러시아(우크라이나), 벨로루시가 합해졌고 소련은 이를 계승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는 1945년 10월 24일 유엔 창립 당시 소련과 별도로 가입했다. 소련(USSR)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SSR) 연방’을 줄여 부르는 나라였다. 우크라이나의 베이징올림픽 성적은 25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