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불의엔 맹수같고 이웃엔 훈훈했던 조맹수 제민일보 전 편집국장”

생전의 조맹수 제주투데이 대표가 2005년 12월 고성무 시민기자에게 기자증을 전달한 후 서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출처 제주투데이>

[아시아엔=김건일 <한라일보> 대표이사, 아시아기자협회 등기이사, 전 제주문화방송 보도국장] “잘가라~~~”김영호형님의 목메인 목소리가 양지공원 숲사이로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질 때, 난 그때사 선배와의 싸늘한 이별을 퍼득 깨달았지요. 가슴이 먹먹해지고 뜨거운 눈물을 느끼며 잿빛 하늘을 쳐다 보았을 땐
까마귀들이 주섬주섬 배웅채비를 하고 있더군요.

삶과 죽음이 하나라더니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만남과 이별도 또 그런건가요,

언론인 조맹수 

조맹수 선배, 선배님은 언론인으로서 제 우상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방송의 모니터 요원 일을 할 무렵, 당시 선배가 다니던 신문사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게 하면서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었지죠. 아니 선배는 그 당시, 어설픈 촌동네 문학청년들의 형이기도 했기에 벌써 인연은 시작됐었던거지요.

하릴없이 20대 중반을 헤매던 제가 군청에 발을 들여놓게 한것도, 기자의 꿈을 키우게 했던 것도 선배였지요. 서른두살 안재헌군수의 권유로 스물여덜 나이에 제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마치 올 것이 왔다는 것처럼 선배는 저를 머슴처럼 부려먹은 거 기억하시나요,

선배의 첫 저서인 ‘제주의 섬’의 교정을 맡긴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지, 북제주군지, 남제주군지같은 원고얼개를 뭉치로 갖다 주면서 문장으로 완성해 놓으라고, 기자가 되려면 좋은 공부가 될거라고, 이제 생각해보면 그때 참 열심히도 배웠네요.

선배가 저에게 일을 시켰던 이유를 금방 알아챘지요. 편모슬하에 나이도 많은 대학생인 제 학비를 도와주려 일감을 챙겨 주셨던거지요. 선배가 받은 원고료는 곧장 제 학비로 바뀌었으니까요.

그 즈음 선배는 정말 대형사고를 치셨지요. 이른바 ‘대지사건’, 권력층의 제주지역 부동산 투기사건을 심층취재하고 보도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잖아요. 그 기사로 기자의 최고 영예라 할 수있는 한국기자상도 받으시고, “저런 기자가 되고 싶다” 그런 마음을 품은 이후 선배는 제 우상이셨어요.

이런 일도 있었지요. 아마도 그때는 1986년 8월이었을거예요. 제가 머물던 대학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와 주말에 서귀포 화신라사라는 곳에 가서 강사장을 만나라하셨지요, 이유는 묻지 말고. 저를 만난 강사장은 다짜고짜 제 몸 치수를 쟀고, 며칠 후 코발트와 잿빛을 섞은 듯한 멋진 양복을 선물해 주시더군요. 양복값은 선배가 지불하셨다면서, 새학기가 시작되면 제가 교생실습을 나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는 새 양복 한벌 맞춰주셨던거지요. 사실 저는 공무원 시절 입었던 낡고 해진 단벌 양복 입고 갈 생각이었구요.

대학시절 제 가난하고 궁핍한 구석구석을 채워 주셨던 분이 바로 선배였습니다.

제가 방송기자가 됐을 때 그토록 기뻐해주셨던 분도 선배였지요. 로얄호텔 한국관, 난생 처음 가본 그 곳에서 기자 입문 축하를 해주셨던 기억 또한 생생한데 벌써 이별이라니요. 이별이란 단어가 왜 이리도 생경한걸까요,

하긴 제가 기자가 되면서 선배와는 점점 멀어졌지요. 선배나 저나 일에 쫓기기도 했고 솔직히 먹고 사는 일이 더 바빴나봅니다. 선배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고 동료들을 쫓아내자 새 신문사 만든다고 동분서주하던 선배의 열정 넘치는 모습이 지금도 제 기억에 또렸하네요.

그렇게 창간한 신문이 제민일보였지요. 일본 특파원으로 재일 제주인의 생동감 넘치는 소식을 전해 줄때마다 선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요. 요즘 지역신문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외국 특파원을 정말 멋지게 하셨잖아요.

선배가 제민일보 편집국장을 그만둘 때, 제가 그 신문사 사정을 살필 입장은 아니었지만 매우 분통을 터트렸던 기억이 선명하네요. 저도 4·3을 취재하는 기자였으니까요. 제민일보는 4·3의 진상규명과 도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선봉에 섰었잖아요.

선배는 신문사를 그만 두고선 제주의 첫 인터넷 신문인 미디어제주를 창간하셨고 제주언론인클럽 부회장과 언론 중재위원 등으로 숙명처럼 언론과 평생을 함께 하셨네요.

선배는 제가 다녔던 회사와도 묘한 인연이 있었지요. 제가 입사한 다음해 회사에서 총선 방송사고가 났었는데 선배께선 한국기자협회의 사건조사단장을 맡아 무난하게 처리해주셨고, 재일 제주인 돕기 캠페인을 할때도 일본통답게 발벗고 나서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많은 것을 도와 주셨지요.

참 이런저런 인연이 칡넝쿨만큼이나 질기게 엮였네요.

그거 기억하세요? 선배가 골프장 대표이사를 할 때 이용권을 주면서 후배들 잘 챙기라고 하셨던 거, 후배 사랑의 마음을 제게 심어주시려했던 선배의 속 깊은 배려였다는 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초지일관 그리 살려 애씁니다.

저는 선배께 받기만 하고 솜털같이 가벼운 마음조차 드린 기억이 없는데 이별이라니, 그리도 홀연히 가시다니 황망 할 뿐입니다.

제주의 겨울 들녘처럼 맑고 푸른 선배께서 떠나시던 날,
마지막 인사 나누려 노구를 마다않고 공원을 찾으신 양우철 전 도의장님,
하얀머리에 온 가슴으로 울음 삼키던 김영호 형님,
언제나처럼 현장 지휘관으로 역할해주시는 김덕남 선배,
미소 가득한 눈으로 말하는 김상철형,
선배가시는 길 카메라에 한컷한컷 놓치지 않으려 정성을 쏟던 곽상필 선배,
예전처럼 만장을 쓴다면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진 만장을 썼을 양상철형,
아~ 우정과 의리의 상징, 선배의 절친했던 벗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던 고봉규형,
말없이 선배 떠날 시간을 초조하게 응시하던 강한성, 김대생 아우,
서귀포에서 5·16도로 빙판길을 넘어온 이석창 대표,
양지공원 문틈 비집고 들어온 휑한 바람 한줌처럼,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끼리 선배를 기억할겁니다.

선배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나요. 하늘나라 가는 열차는 무지개 빛일까요, 🌈

작년 여름 그렇게 말도없이 그리도 바쁘게 훌쩍 떠난 허성수형이나, 며칠전 슬프디 슬픈 부고로 가슴 울렸던 좌승훈 아우도 얼른 만나시겠군요.

세상 소풍이 즐거웠다고 하하 웃으시겠지요.

어쩌다 제가 선물로 받은 와인을 선배께 드리면 그날은 온통 세상 시름을 잊는 파티 날이었는데, 이제 누군가 와인을 선물로 주면 선배를 기억하는 애끓는 시간이 되겠네요.

정론직필, 저로서는 아직도 다 배우지 못한 이 네 글자를 제 가슴에 아로 새겨주시려 부단히도 애쓰셨지요.

저뿐 아니라 모두에게 훌륭한 기자이셨습니다. 참 잘 사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그곳엔 대선도 없고 제 2공항 짓는다만다 하는 다툼도 없겠지요. 세상 걱정 근심 훌훌 털고 날려 버리셨지요. 선배를 보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으로 살아갈 형수님과 자녀들의 삶도 살피면서 변함없이 응원하겠습니다.

선배의 명복을 한결같이 기도할께요.

나의 우상이었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조맹수 선배,
안녕~~~

김건일 올림 

조맹수 지은 제주의 섬

*1월 12일 별세한 조맹수(67) 전 제민일보 편집국장은 서귀포시 출신으로 남주고, 광주대 신문방송학과,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했다. 제민일보 주일특파원·논설위원·편집국장,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언론중재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84년 ‘이정식씨 제주 땅투기사건’ 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제주의 섬>, <한국은 조국, 일본은 모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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