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윤리 실종 땐 지구촌 전체가 후퇴”
에너지R&D 청렴서약…“연구부정 사례 ‘반면교사’로 삼아야”
투명성과 윤리성이 비교적 잘 정착된 나라들로 알려진 미국 등 서방 국가들도 앞서 전 세계를 경악케 한 수 차례의 연구 부정사건으로 국민 혈세를 허투루 쓰는 한편 국책연구개발 과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자초한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상업화와 함께 격화되는 연구경쟁 환경에서 연구 수행기관들이 자신들의 명성에 금이 갈까봐 연구 부정을 발본색원하지 않고 쉬쉬하는 관행이 굳어져 연구윤리를 전반적으로 위협, ?서구 국가들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회책임윤리경영연구소(ISPBE) 정운용 소장(법학박사)은 7일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원장 안남성, 에기평)이 5개 에너지 연구개발(R&D) 기관 대표들과 가진 ‘2012년 에너지R&D 청렴서약식’ 기조강연에서 “연구 윤리가 무너진 것의 일차 책임은 연구자를 관리-감독하는 연구수행기관에 있다”면서 이 같이 밝혔다.
정 소장은 에기평 임직원 등 540여명의 에너지 R&D 수행책임자들이 대전역 철도시설공단에서 치른 이날 행사에서 미국 등 서방국가들에서 발생했던 각종 연구부정사례를 유형별로 골라 자세히 설명했다.
정 소장에 따르면, 미국 보건당국은 매독환자가 많았던 앨러배마 주(州)의 흑인 매독환자 600여명을 “병을 고쳐주겠다”면서 실험대상자로 모집, 1932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0년 동안 치료 없는 실험만 강행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심지어 보건당국 산하의 보건소에 “매독환자들을 치료해 주지 말라”는 공문을 내린 것으로도 드러나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미국은 이와 함께 1940년 페니실린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과테말라 교도소 수백 명의 죄수들에게 고의로 매독균을 주입, 인간을 사실상 임상실험 도구로 삼았던 ‘반인륜성’이 드러나기도 했다.
정 소장은 아시아 각국의 연구개발 청렴도 수준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국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 지역에서는 비교적 높은 연구윤리 수준을 보이고 있다”면서도 “격화된 연구수주경쟁과 상업화 추세에서 아직도 연구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잔존,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대답했다.
지난 5월8일 취임한 에기평 안남성 원장은 에너지자원과 신재생에너지, 전력원자력, 인력양성, 기반조성 등 5개 연구개발 분야 대표들과 청렴서약식을 가진 뒤 “올해를 연구윤리 강화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안 원장은 또 “에너지R&D사업 예산이 1조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연구윤리는 연구자의 기본적 소양임과 동시에, 국가 R&D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조건”이라며 “연구비가 투명하게 집행 될 수 있도록 주관책임자와 평가원 임직원 모두 반부패·청렴에 앞장서자”고 제안했다.
연구자의 숭고한 사명이 공동체 발전 밑거름
1974년 뉴욕에서 피부암 연구를 하던 면역학자 윌리엄 서머린(William Summerlin)은 피부이식 거부반응 연구에서 검은쥐 피부를 흰쥐 피부에 이식한 것으로 보고했으나, 사실은 흰쥐 피부에 검은색 염료를 입힌 것으로 드러났다.
청렴성과 투명성을 자랑하던 독일에서도 연구를 조작한 사건이 있었다. 유전자 치료 전문가인 헤르만과 그의 제자 브라흐는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수십 편의 논문에서 데이터를 조작, 1997년 발각돼 국가와 소속 대학으로부터 파면 당했다.
독일 생물학자로 자신의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각종 동물들의 배 단계의 모양이 유사한 모양을 나타냈다고 거짓 발표한 헤켈(Ernst Heinrich Haeckel)은 동물별로 완전히 다른 모양의 배를 촬영한 리처드슨 때문에 자신의 연구결과가 완전한 조작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헤켈의 연구결과는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2006년 황우석 박사 사건, 김병준 전 부총리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과 고려대 이필상 교수 논문 표절 등 한국도 논문 표절과 연구비 부정사용, 정부지원금 유용, 연구원 인건비 횡령 등 연구개발 관련 부정부패가 만연돼 있다는 지적이다.
사회책임윤리경영연구소 정운용 소장은 “2012년 현재 무려 16조원에 이르는 연구개발 예산 지원이 이뤄지고 있고, 연구실적에 따른 연구자 처우 차별화 추세에 따라 연구 경쟁은 격화되고 있다”면서 “연구개발이 학문의 영역에서 상업적 영역으로 옮겨간 만큼 연구부정을 일부의 사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특히 “투명한 연구개발을 위해 국가차원의 상설검증기구를 설치하자는 일부 주장은 연구자의 창의성을 말살하는 것이므로 단호히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안전’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이유는 자기암시를 통해 본능적으로 안전을 희구하는 행위”라면서 “연구의 중요성과 기관의 책임을 공유한 뒤 뻔한 얘기로 받아들이지 말고, 요식행위가 아닌 서약서를 작성하라”고 권고했다.
정 소장은 ‘부정부패 근절’식의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적극적 연구윤리를 실천하는 개념으로 접근하기 위해 정직성과 정확성, 효율성, 객관성 등 4가지를 연구자들에게 꼭 필요한 연구윤리의 덕목으로 꼽았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