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65] 후보 단일화···안철수 꽃가마 탈까?
정치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단일화’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DJP 단일화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뒤로 선거 때마다 단일화가 거론됩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단일화가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윤석열 후보 지지율이 이재명 후보에게 뒤지고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다시 단일화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부터 윤석열 후보나 김병준 위원장은 안 후보를 끌어들이겠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안 후보에게 비우호적이던 김종인 위원장도 최근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재명 후보도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안 후보에게 호의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단일화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1997년 제15대 대선의 DJP 연대일 겁니다. 지지기반이나 정당의 이념이 서로 다른 두 정당의 연대인 DJP 단일화는 정권을 잡기 위한 짝짓기라고 비판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와 조순 민주당 후보도 단일화를 했다는 사실은 기억하는 시민이 거의 없을 겁니다.
이회창-조순 단일화는 매우 부적절한 단일화였습니다. 야당끼리의 전략적 연대인 DJP 단일화와 달리 이회창-조순 단일화는 여당과 야당이 손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아예 합당까지 했습니다. 당시 언론환경이 김대중 후보에게 비우호적이었기에 DJP의 문제점은 과대포장되고, 한나라당은 거의 문제 삼지 않았던 겁니다.
제15대 대선에서 자신을 공천해준 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한 건 권영길 국민승리21후보뿐이었습니다. 김대중 국민회의후보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동후보, 이회창 신한국당후보는 한나라당후보가 되었습니다. 김종필 자민련후보와 조순 민주당후보는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신한국당 경선에 나갔던 이인제 후보는 국민신당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단일화는 2002년 제16대 대선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입니다. 노 후보는 사상 첫 국민경선을 통해 당내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꺾었습니다. 거센 ‘노풍’은 ‘이회창 대세론’마저 꺾을 기세였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문제로 새천년민주당 지지가 떨어졌고, 노 후보 지지율도 함께 떨어졌습니다.
비주류인 노무현 후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반노무현 세력은 6.13 지방선거 참패를 계기로 후보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월드컵 4위라는 눈부신 성과(?)를 등에 업고 정몽준 의원이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로 떠올랐습니다. 민주당 안에서는 ‘후보교체론’까지 나왔고, 김민석 최고위원은 탈당해 정몽준 후보에게 달려갔습니다.
김민석 탈당이 노무현 동정론을 불러일으켜 노 후보 지지율이 반등하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추진되었습니다. 노 후보는 단일화방식 협상에서 자신의 불리를 감수하고 정 후보가 요구한 여론조사방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사결과 노 후보가 극적으로 이겼고, 본선에서도 이회창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습니다.
DJP 단일화가 처음은 아닙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때 이미 후보단일화가 있었습니다. 군부정권에게 이겨 민간정권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유진오-윤보선 단일화가 추진되었습니다.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해 유진오 총재-윤보선 후보의 신민당이 출범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졌지만 반군사독재진영이 하나로 뭉쳤다는 성과는 남았습니다.
선거 때면 왜 단일화가 으레 거론되는 걸까요? 어느 정당 어느 후보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니까 이해관계를 따져서 단일화가 추진되는 겁니다. 선거, 특히 대통령선거는 권력재편의 시기이므로 단일화는 정치세력의 재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시민의 뜻이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단일화는 선거공학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