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88] ‘제14대 대선의 추억’-관권선거와 도청

초원복국집

선거는 축제입니다. 민주주의의 주인이 시민임을 확인시켜주는 민주주의 축제입니다. 민주주의에서 ‘시민 정치참여의 중앙통로’인 선거는 시민이 주권자임을 확인시켜주는 제도입니다. 후보와 정당은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시민들로서는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고, 좋은 정치인을 뽑을 수 있는 즐거운 행사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입니다. 이 헌법 조항을 실천하는 도구가 바로 선거입니다. 선거는 주권자인 시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 형성을 보장하고, 시민의 뜻을 바탕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민주주의가 확립되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아직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할 겁니다. 민주주의가 굳건히 뿌리를 내린 나라에서는 이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선거를 먹고 자란다.“

”탄환 대신 투표로(Not Bullet, But Ballot).“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과거에는 권력의 장악과 유지에 군대 등 물리력이 동원됐지만 이제는 법 절차에 따른 공정한 선거가 권력의 정당성(legitimacy)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5.16, 12.12 등 총칼로 권력을 빼앗고, 총칼로 시민을 윽박질렀던 독재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선거는 또 한편으론 전쟁이기도 합니다. 대의민주주의에서는 권력구조가 대체로 ‘승자독식주의’로 설계되어 있다 보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관권선거, 돈 선거, 지역감정 유발, 흑색선전, 인신공격 등 온갖 비열한 불법적 방법들이 동원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92년 오늘 일어난 ‘초원복국집 사건’입니다. 제14대 대선 때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의 당선을 자신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김기춘 전 법무장관이 부산에 내려가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시 교육감, 부산상공회의소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등을 불렀습니다. 이들은 복어요리 전문점 초원복국에 모여 관권선거를 모의했습니다.

이들은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정주영(통일국민당) 김대중(민주당)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지역감정이 유치할진 몰라도 고향 발전엔 도움이 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관권선거를 다짐했습니다.

정주영 후보 측이 도청을 했습니다. 투표 3일 전에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김영삼 후보 측은 음해공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이 도청의 최대 피해자라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지만, 도덕적인 타격을 입어 당선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었습니다. 지역감정을 더 자극해 영남 지지층이 결집했다는 분석들이 나왔습니다.

오히려 부도덕하다고 역풍을 맞은 건 정주영 후보였습니다. 언론은 지역감정 자극과 공권력의 선거 개입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거침입에 의한 불법 도청’이 더 나쁜 범죄라고 낙인찍었습니다. 도청에 관계한 통일국민당 사람들은 모두 주거침입죄로 처벌을 받았고, 초원복국집에 모인 사람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기관장들을 불러모은 김기춘 법무부 전 장관(1991.5~1992.10)만 기소되었다가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선거법 제36조 1항(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끝내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초원복국집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도청보다 공권력의 선거개입과 지역감정 자극이 더 문제라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다면 제14대 대선의 결과는 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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