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죽음과 ‘역사의 평가’

전두환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손자가 조부의 영정을 운반하고 있다.

전두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노태우에서 정권을 받았다가 오히려 돌려친 김영삼은 방법이 다르다. 박철언은 이를 정확히 내다보고 있었다. 노태우는 체육관 선거가 아니라 국민 직선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김영삼은 이를 부정하여 5공, 6공을 합하여 부정했고 군사정권에 복무한 장관들을 싸잡아 비난했는데, 과연 그것이 모두 정당화될 수 있을까?

5.18 후 국보위의 주체는 육사 16기, 17기, 18기, 19기였다. 이들 중 교수부에 간 사람들은 서울대에서 위탁교육을 마치고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를 받았다. 당시 졸업성적 1등에서 4등까지는 국비로 미국 유학을 시켰다. 일반 대학생들에게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고작이었다. 법대 수석을 해도 별 수 없었다. 그러나 육사를 나와 박사를 한 대표주자가 18기로 오명 박사다, 임인조는 생도시절 축구선수였는데 퍼듀대학에서 아메리칸 풋볼 선수로도 활약했다.

심지어 ‘똥 박사’가 있었다. 인분을 분해하여 쓰레기를 처리하는 토목공학 박사였다. 환경이 문제가 되는 오늘에 딱 맞았다. 밴더빌트 경제학 박사 오관치의 경우 같이 공부하던 서울대 상대의 변형윤 박사는 오관치가 강의실, 도서관 외에 아무데도 안 가고 공부에 열중하던 것을 기억한다.

홍병유는 3년반 만에 콜럼비아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했다. 이들이 전두환의 통신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전두환은 사람을 한번 사람을 믿으면 철저히 전권을 위임했다. 대표적인 것은 김재익 경제수석이다. 이들은 한 시대의 정수精髓였다.

승자는 특정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다. 史實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노태우의 6.29 민주화선언이 처음 나왔을 때 전두환이 만든 각본의 하나라는 풍문은 당시에도 나왔지만 한참시간이 지난 이제는 공공연하다. 김영삼 정권은 전두환의 군부가 정권을 잡았다가 돌려준 것인데 이것은 역사에 흔한 일이 아니다. 6월항쟁 기간 계엄령 발동과 병력 출동을 거부한 민병돈 장군은 이를 대표한다.

신익희는 1952년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다녀왔다. 그가 귀국했을 때 뉴델리에서 1950년 전쟁초기 납북되어 북한으로 간 조소앙을 만났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조병옥은 이를 확신하였다.

신익희는 민의원 의장이었고 조병옥은 내무장관이었다. 신익희는 김구와 함께 중국에서, 조병옥은 이승만을 도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지사였다. 신익희와 조병옥 둘이 이승만을 떠나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불시에 서거한 것은 한국정치사의 비극이었다.

이들은 김영삼, 김대중을 거느리던 영수급이었다. 이들과 함께 시대가 사라지고 야당이 양김 수준에 이른 것은 일렀다. 공화당이 삼선개헌으로 정구영이 사라지고 김종필에 이른 것도 빨랐다. 3김은 너무 일렀고, 너무 오래 갔다.

자유당 시절 우파가 친일파에 휩싸였다는 좌파의 주장은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이었다. 이들의 수족이 관료였다. 관료는 그나마 일제와 미군정하에서 훈련된 자원이었다. 한국에서는 군대가 훈련된 자원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해외를 보내 공부를 시킨 조직은 군대가 유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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