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계엄령선포 유보와 민병돈과 전두환
노태우 6.29 민주화선언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한다. 그들에게 민주화는 당연히 김영삼, 김대중을 비롯한 민초들의 몫이었다. 당시를 살지 않았던 중년 이하 사람들에는 특히 그러하다. 호헌을 주장한 전두환의 4.13선언도 충격이었지만 이를 뒤집은 노태우의 6.29 선언은 감격, 바로 그것이었다.
혹자는 신군부의 항복선언이라고 했지만, 6.29 선언은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였다. 대구 경북(TK)이 노태우 정부 주도세력이라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이후에 권력을 잡은 장관, 장군 대부분이 대구 경북 출신이었다. 이들에게 한국을 左之右之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박정희의 시월유신은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긴급조치 통치 이래 함석헌, 장준화, 문익환 등 재야는 감옥에 갔다. 김대중도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나서 미국으로 갔다.
그 7년 뒤인 1979년 12.12로 신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유신정국의 연속이었다. 1987년 4.13 호헌 선언으로 정국은 숨이 막혔다.
1980년 5월에 광주 민주화시위에 이어 7년 뒤인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노태우 대선후보가 선출되는 것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민주화투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전두환은 계엄령 선포를 검토하였다. 고명승 보안사령관은 대대장, 연대장들이 반대한다는 군심을 전했다. 그런데 막상 부대를 출동시켜야 할 민병돈 특전사령관이 반대했다. 민병돈은 전두환 1공수특전단장 밑에서 대대장을 지냈다.
전두환과 민병돈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사이였다. 광주 민주화시위는 초기에는 학생 데모였다. 그러나 군중이 무기고, 교도소를 습격하면서 무장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당시 시민군을 이끌었던 사람이 노태우 서거를 맞아 조문을 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87년 6월 민병돈 장군이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 것을 보고 전두환은 뜻을 꺾었다. 전두환은 믿었던 후배의 고집에 생각을 바꾼 것이다. 민병돈은 독특한 군인이었다. 생도 때 별명이 민따로였다. 추가고시를 보러 혼자 교수부에 가면서도 생도대의 일부로서 행진하는 것처럼 제식동작을 했다. 독일어를 잘 해서 독일 장교단 역사를 자세히 알았다.
집안이 민영환 충정공과 민비 집안이었는데 그는 꼭 명성황후라고 불렀다. 육사 교장 시절 졸업식장에서 노태우 대통령에 경례를 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 인사는 입장 때 이미 했으니 번거롭게 다시 경례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청와대 참모들에게는 무언가의 불만 표시로 보였다. 그는 얼마 후 예편되었다. 예비역 중장 연금은 현역 소령 봉급과 같았다. 그는 공사 사장 등 다른 자리를 구하지 않고 2019년 별세한 부인도 여기에 맞춰 살도록 하였다.
전두환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가정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지만, 상상력을 동원해서 가정을 하여 김재규가 육본으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중앙정보부는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을 제외하고는 못할 것이 없는 무소불위였다. 육본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이 보안사령관에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정승화 육균 참모총장은 시해 현장에 있었고 국군보안사령관은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았다. 전두환의 행동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김재규는 불의의 대통령 시해 후 우왕좌왕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과적으로 전두환은 대통령 유고 시 국가 위기관리를 잘한 것이다. 역사는 시간을 두고 평가해야 한다. 12.12 후 한 세대가 넘었고 전두환이 가고 없는 지금 전두환에 대한 평가도 냉정하게 되어야하지 않을까 한다. 국립묘지 안치와 같은 민감한 문제도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