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불러온 부패 법복귀족, 우리 사법부엔?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을 풍자하는 그림. 판사들은 법과 정의가 아니라 돈과 연줄로 재판하면서 더 많은 권력을 사들이곤 했다. 법과 재판의 저울 위에 정의 대신 돈이 올려져 있다. 그림은 1769년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나무위키>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인터폴 부총재]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관직을 전리품으로 생각하여 선거운동 공로자에게 나눠주는 제도가 바로 엽관제다. 정실에 따른 임명과 파면은 절대군주도 이용했다.

1589년 프랑스 부르봉왕조는 앙리 4세 즉위로 시작했다.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했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 1840년까지 이어졌다.

시조 앙리 4세는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온 대토지를 소유한 대귀족 등살에 기를 펴지 못했다. 이들 힘이 강대해 “폐하 그건 안 됩니다”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일을 못했다. 이를 평정하는데 고생했다.

1604년 내편 만들기를 시작했다. 심복인 금융업자 샤를 폴레트(Charles Paulet) 건의로 폴레트법(à la taxe Paulette)을 제정했다. 내 말 잘 듣는 공무원에게 돈 받고 그 자리 상속케 하는 관직 세습세를 도입한 것이다.

국고수입도 되고 왕 심복도 만들고

새로운 제도는 아니었다. 봉건귀족이 몰락하면서 이미 관행이 됐다. 돈 번 부르주아가 지방의 관직을 사서 자식들에게 주고 관계에 진출시켰다. 관직은 귀족으로 행세하는 수단의 하나가 됐다.

앙리 4세는 아예 법을 제정해 관직 가격을 미리 정하고 그 가격의 60분의 1을 관직 계승세로 매년 징수했다. 물론 현찰. 사임 40일 전에 선언만 하면 자식이 상속했다. 9년 분 선납하면 40일 규정도 면제했다. 수입 좋았다.

새 공무원은 재판관이 많았다. 대학에 다녔고 학위 수여식에서 gown이나 robe를 입었다. robe를 입은 귀족을 법복귀족(法服貴族, Noblesse de robe)이라 했다. 바로 문관(文官)들이다. 왕의 편에 섰다.

이들과 대립한 옛날귀족이 기사계급이다. 기사계급의 후예로서 군무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대검귀족(帯剣貴族, noblesse d’épée)이다. 총칼 휴대하고 전쟁터 나가 싸웠다.

법복귀족과 대검귀족은 1789년 프랑스혁명 전 시대에 제2계급을 구성했다.

권력 장악하자 왕 배반

생시몽(Saint-Simon) 공작 눈에는 대검귀족은 점점 밀려나고 미천한 촌놈들이 권력을 쥐락펴락 하는 게 못마땅했다.

루이 14세의 초대 파리경찰청장 니콜라 가브리엘(Nicolas-Gabriel de La Reynie)은 금화 15만냥으로 자리를 샀다. 1667년부터 1697년까지 30년간 재직했다. 싼 가격이다.

122년간 모두 14명의 파리경찰청장이 재직했다. 모두 법복귀족으로 자리를 사서 수도 파리의 치안을 다스렸다.

1789년 법복귀족은 전부 관직 상속자였다. 영향력 독점했다. 이들은 프랑스 전국의 13개 고등법원에 웅크리고 앉아 최대로 권력을 행사했다. 법관 1천1백명이 그들이었다.

왕 편이던 그들은 세력 커지자 자기들 권익 유지가 더 중요했다. 왕 반대파 됐다. 개혁 걸림돌이 됐다. 프랑스혁명 발발 원인의 하나였다. 하류국가에서는 법관들이 오늘도 잘 나간다. 부패한 교수와 오염된 언론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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