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워털루전투 패배···”보수반동을 불러오다”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1815년 벨기에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됐다. 23년간 계속됐던 유럽에서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보수세력은 프랑스혁명의 재발을 두려워했다. 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를 중심으로 뭉쳤다. 세상을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되돌려 놓기로 했다.
왕이 단두대에서 목 잘리지 않고 귀족이 재산과 특권을 몰수당하지 않는 세상이다. 이들이 서로 협력해 지켜내는 ‘빈 체제’(Wiener System)가 구축된 것이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검열과 정치사상 탄압 그리고 밀정이 동원됐다. 기득권 보호가 최우선 과제였다.
실업과 기근이 1848년을 부르다
언론과 출판과 연극은 당국에 미리 원고를 제출해서 허가 받게 만들었다. 반체제 인물과 조직에는 정치경찰과 사상경찰이 따라붙었다. 정권의 눈과 귀가 된 스파이는 쉴 짬이 없었다.
유명한 예가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다. 책 불 태웠다. 유학자 산 채로 매장했다. 나치도 1935년 ‘베를린 분서’를 자행했다. 책 불태우는 곳에서는 인간도 불태운다.
흑인음악의 하나인 ‘부기’. 2차세계대전 시작 전부터 미국에서 유행했다. 이 리듬의 노래를 부른 일본 여가수 시즈코는 전쟁 시작되자 미국노래 부르는 여가수라 해서 경시청 공안형사가 따라 붙었다. 지시사항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너무 왔다갔다 하네. 사방 1m 안에서만 움직여라. 객석 향해 엉덩이 왜 돌리나. 직립부동자세로 노래 불러라!” 등등…
적성가수(敵性歌手) 딱지가 붙었다. 수시로 경찰서로 호출했다. 공연을 펑크 냈다. 일류극장은 공안형사 압력에 출연금지, 변두리 돌며 불렀다. 그런다고 인간정신 말살되지는 않는다.
나폴레옹이 1821년 죽은 지 27년, 유럽대륙 다니며 뿌린 프랑스혁명 사상 즉 자유와 평등에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잠복해 퍼져나갔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를 날 기다렸다.
도시는 농촌 떠나온 실업자로 붐볐다. 노동자는 임금으로 가족 먹여 살리기 힘들었다. 거기에 흉년이 연속돼 빵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혁명에의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1848년 공산당선언의 출판이 신호탄 됐는가. 유럽의 도시마다 혁명 터졌다. 출발은 좋았다.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계층별 희망사항이 달랐다. 귀족과 대부호 및 대상인은 더 많은 특혜를, 신흥 부르주아지는 자유로운 돈벌이에 관심 많았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및 선거권을 요구했다. 농민은 노예와 같은 소작농 신세 탈피가 꿈이었다.
보수가 혁명을 분쇄
집권층이 혁명세력의 분열상 알아차렸다. 무력으로 진압하면 불은 꺼진다고 확신했다. 혁명 외쳤던 교수, 대학 졸업자와 재학생은 도망가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