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백두산아, 동북아 정세 어찌 흘러갈꼬?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백두산에 올랐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만주족(여진족)에도 성산聖山, 영봉靈峰이었다. 백두산은 2744m의 고산이지만 중간에 오르기까지 평원이다.
1712년 숙종 때 세운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동위토문(東爲土門)에서 청(淸)은 토문을 두만강으로, 우리는 송화강으로 본 것이 문제다. 백두산은 김일성 항일투쟁의 성지로 여겨졌다.
1952년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 맺어져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이 정해졌다. 6.25전쟁에서 중공군이 북한을 한참 지원하고 있을 때였다. 통일이 되어 중국과 다시 논의할 일이로되, 쉽지 않아 보였다. 관련 자료는 계속 축적해야 한다. 러시아의 협조가 긴요하다.
1909년 일본은 간도협약으로 土門江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하여 간도를 넘겨주고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이것이 중국과 진짜 오래 결판을 봐야 할 문제다.
만주는 75만㎢로 대륙이다. 길림성吉林省이 한반도와 비슷한 23만㎢, 요녕성(遼寧省)이 14.6만㎢, 흑룡강성(黑龍江省)이 37만㎢로 일본만 했다. 1932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은 조선과 일본보다 합한 것보다 크다. 청의 선통제가 신해혁명으로 청을 잃으면서도 돌아갈 땅이 있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즉 만주는 청의 고토였다. 중화민국이 세워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이어져 만주족은 백수십만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나머지는 유모의 영향으로 한족에 동화됐다.
봉천奉天은 과거 심양沈陽이다. 원元은 몽골인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충선왕이 카이산(무종)의 계승에 공을 세운 것을 사서 일종의 작위인 심양왕으로 봉했다. 병자호란 후 인조는 청의 요구에 따라 소현세자를 인질로 보냈다. 소현세자는 인질로 있으며 마테오 리치 등 서양인과 교유했는데 귀국해서도 여기에 관심을 보이자 격노한 인조는 세자를 죽였다.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벼루으로 맞아 죽었다는 요설이 돌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인조는 세자비와 세손을 모두 무참하게 죽였다. 그 자손에서 정조가 나온 것도 기묘하다. 왕비를 잘 고른 덕택일 것이다.
청의 4대 강희제康熙帝는 시호가 성조聖朝다. 그가 14번째 왕자 옹정雍正에게 황제를 물려준 것이 손자에 반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그가 건륭제다. 건륭제는 61년 재위에 있다가 스스로 퇴임했다. 존경하는 조부 강희제를 넘지 않기 위해서다.
오늘날 중국 영역은 건륭제가 개척한 영토와 비슷하다. 청의 강희-옹정-건륭 3대는 한 무제(漢 武帝), 당 태종(唐 太宗)과 더불어 극성기로 통한다.
17세기에 청은 동진하는 러시아와 충돌한다.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분쟁이 계속되었다. 효종 때 청에서 조선에 요청하여 총병이 출병하였다. 효종의 북벌 준비가 역설적으로 효과를 거둔 것이다. 1969년 진보도(珍寶島, 전바오다오, 다만스키)에 침공한 중공군은 소련군의 화력전에 녹았다.
일본 관동군이 1939년 노몬한(만주와 몽골의 국경지대인 이곳에서 일본군과 몽골·소련군 간의 대규모 충돌사건)에서 당한 패배의 재판이었다. 다급해진 중공은 월남전에 지친 미국과 화친하여 소련에 대항하게 된다. 키신저의 핑퐁외교가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21세기 시진핑의 중국몽은 미국이 가로막고 있다. 바이든은 중국을 제일의 적으로 규정했다. 유럽과 일본도 가세하고 있다. 한국도 만만치 않다. ‘중국식 특색의 사회주의’는 말만 적당히 바꾼 공산주의다. 중국의 전통적 패권추구는 여전하다.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실크로드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로 연결한다. 중국에서 동남아, 중동, 중앙아시아, 유럽에 이르는 길을 연결하여 중국 중심의 단일경제권을 형성하자는 것이다. 일부 한국기업도 참여를 모색하고 있다. 한국에서 중국을 거쳐 시베리아로, 러시아에서 네덜란드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