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육사 출신 김석원 설립 성남고, 이승만 정권 하 백범 묘소 참배

성남고교 전경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김석원 장군은 성남고교의 교장을 지낸 교육자였다. 자세는 항상 곧았다. 중일전쟁에서 행군을 많이 해서 편하다고 했다. 당시 김석원 중좌는 용맹으로 유명했다.

봄철 청명에 학생들과 함께 효창공원으로 가 윤봉길 의사와 백범 묘소를 참배했다. 어느 해 4월 28일 충무공 탄신기념일 현충사 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석원 장군을 보고 먼저 일어나 인사했다. 군의 대원로이기도 하였지만 김석원 장군의 둘째 아들과 그가 일본 육사동기였기 때문이다.

1893년 서울에서 출생한 김석원 장군은 1917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광복이 되기까지 일본 육군장교로 복무했다.

1938년 원윤수 선생과 원석학원(元錫學園, 성남중학)을 설립하여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육군대좌로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8·15광복 후 일본육사 출신은 자중한다고 해서 늦게 국군에 들어 육사 8기 특임으로 대좌에 기용된 후 1949년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1사단장이 되었다. 남북교역 문제로 채병덕과 대립, 그해 10월 예편되었다.

6.25 중 김석원 장군(가운데)

6·25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에 복귀, 수도사단장·3사단장을 역임한 다음 1956년 육군소장으로 예편되었다. 같은 해 성남 중·고교 교장으로 취임,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1년에는 원석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일본도를 쥐고 진두지휘하는 지휘 스타일은 미군 고문관과 맞지 않아, 일찍 군을 그만두고 광산으로 큰돈을 번 원윤수의 도움을 받아 교육에 전념했다. 4.19 후 영등포에서 당선되어 민의원 의원도 잠시 했으나 5.16으로 그만 두었다.

성남중 교장 시절 김석원 장군(1955년)

그의 교장 시절 성남고교의 교훈은 ‘의에 살고 의에 죽자’였다.

성남고에는 특이하게 교련 과목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중고등학생 전원의 행진이 있었다. 이를 지휘하는 훈련부가 따로 있었다. 학생들은 유도, 검도 중 하나를 택했다. 야구부는 1960년대에 전국을 제패했다.

밴드부는 서울시 고교밴드경연대회에서 ‘윌리암 텔 서곡’, ‘핀란디’ 등을 연주하며 우승했다. 그 곡들은 고교 밴드부로서는 무척 어려웠다.

본관 앞에 감나무 한그루가 있다. 늦가을이 되어 감이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학교 들어서자마자 설립자 원윤수 선생과 김석원 장군의 흉상이 있었다. 1960년 고등학교에서 최초로 분기한 4.17학생운동기념탑이 있다.

김석원 장군의 흉상은 친일군인 논란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전교조 요구 때문이었다.

매주 이사장 훈화가 있었다. 국가관과 국방이었다. 전교체육대회가 끝나고 훈화가 있었다. 긴장한 학생들에게 “수고들 했다” 딱 한마디였다. 학생들은 모두들 “와” 하며 탄성을 올렸다. 장군의 웅변이었다. 학교는 최고의 교사진으로 구성했다.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의 일반사회 교사, 이학부 출신의 생물 교사도 있었다.

성남고에서는 사관학교 진학을 장려했다. 일본 해군성 정문에 이순신 장군 함선의 닻이 있는데 적장 이순신이 쓰던 것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에 일본이 이순신에 얼마나 혼이 났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윤봉길 의사의 손자를 키워서 학교에서 졸업시켰다.

김석원의 생애는 구한말부터 일제를 거쳐 해방과 창군, 6.25전쟁에서 산업화에 이른다. 이 기간에 유위한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준다.

김석원 장군을 친일군인 한마디로 단언하기에는, 전공과 교육자로서의 그의 자취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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