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군의문사 최우혁 34주기···2021년 대한민국 군대는?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매년 8월 말, 9월 초 전해오는 소식이 올해도 어김없이 오늘 오전 카톡에 떴다.
“안녕하십니까? 최우혁열사 기념사업회입니다. 최우혁열사 34주기 추모기념식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방역 지침에 의해 공식행사는 하지 않고, 9월 4일 12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유가족의 묘소참배와 기념사업회 관계자/지인들의 별도 개별참배로 대신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현재까지의 추모기념사업 경과(최근 녹화 선도공작 의문사 대책위원회 활동 포함)를 첨부하오니 현장에 함께 하지는 못하더라도 추모의 마음을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2022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추모행사장에서 꼭 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낸이는 예년과 다름없이 최우혁열사의 대학 친구 김치하씨다. 핸드폰 단말기를 여러 차례 바꾸고 남아 있는 것만 해도 2010년대 이후 한해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카톡이 대중화하기 전에도 다른 채널을 통해 전해왔다.
지난 6월엔 “우혁이 행사는 아시다시파 작년에는 방역을 위해 유가족과 기념사업회 일부 인원만으로 조촐하게 진행했는데 올해는 많은 분들을 모시고 제대로 기념식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지만, 2달여 지난 지금 상황이 작년과 마찬가지다.
최우혁의 서울대 서양사학과 84학번 동기이자 친구인 김치하씨는 1987년 최씨가 군의문사로 세상을 떠난 이후 매년 기일을 전후해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 벗이 이처럼 친구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까?
최우혁열사기념사업회가 소개하는 약력이다.
△1966년 3월 서울에서 父 최봉규 母 강연임 슬하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1984년 3월 서울대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입학
△1984년 서울대내 ‘경제법학회’ 가입
△1984년~1986년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서서 전방입소 거부투쟁 등 각종 시위와 집회에 참석
△1986년 5.3 인천시위, 5월17일 ‘헌제의회’ 소집요구투쟁참가
△1986년 5월 20일 서울대 민족해방제 기간 중 이동수열사 분신 목격 후 학내 진입한 경찰에 맞서 싸우다 전치 10주의 부상을 당함
△1986년 하반기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현장활동 시도 등 노동현장으로 이전 준비
△1987년 4월 28일 학생운동에 참가하다 구류를 살고 부상까지 당하는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의 강권에 의해 군입대(육군 20사단 60여단)
△군입대 후 대학 재학시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인하여 보안대 등에 의해 관찰대상으로 지목, 지속적인 관찰과 면담을 받음
△보안대 관찰 사실을 안 부대원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고 유격훈련 중 심한 구타로 부상을 입음
△1987년 9월 8일 민주화 활동에 대한 보안부대의 관찰, 공작 및 부대 내 구타 등으로 최후의 항거수단인 분신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산화한 것으로 잠정 결론 지어졌으나 여전히 그 죽음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의문의 상태로 남아있음.
다음은 진상규명 활동과 추모기념사업이다.
1)열사의 죽음을 단순한 개인적 고민에 의한 분신자살로 규정지은 군수사기관의 발표에 대해
-그의 죽음이 민주화운동에 치열하게 투신하며 시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던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군이라는 특수한 조직내에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려는 군내부기관(보안대 등)의 직접적이고 조직적인 공작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확신에 따라
-대학 동료들은 제대한 군동료들과 관계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만남과 조사를 시도하였으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등으로 의혹해소를 위한 결정적 증언확보에는 이르지 못함
2)진상규명 요청 활동에 대해
-이후 군수사기관, 국방부, 국회, 대통령 등 관련기관에 지속적인 진상규명요청을 하면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대책위원회’ ‘민주화운동정신계승연대’ ‘민족민주열사 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등과 연대하여 암울한 억압의 시대에 희생된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제도적 장치를 위한 법제정 투쟁 및 올바른 법시행을 위한 지속적 활동을 전개
-2004년 6월 14일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당초의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1기 위원회의 결론과는 달리 열사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보안대의 관찰, 공작 및 군내의 가혹행위 등으로 최후의 항거수단인 분신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산화하였으며, 향후 열사를 둘러싼 보안부대의 구체적 공작내용을 조사하여 열사의 죽음에 대한 보다 명확한 진상을 규명하고, 열사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냄
3)민주화운동 관련자 결정 및 서울대에 추모비 등 건립
-2006년 7월 31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보상 및 명예회복 결정을 받음
-2008년 2월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열사의 민주화활동에 대한 공헌과 희생에 대해 열사의 모교인 서울대에 다른 6명의 열사와 함께 명예졸업장 수여 권고하였으나 제적되어 규정에 맞지 않다는 형식논리로 수여 대상에서 제외
-대학당국의 비상식적인 결정에 대해 열사추모단체 /서양사 및 경제법학회동문회/서양사학과 재직교수 등과 공동대응 끝에 학교측의 규정개정으로 2008년 8월27일 졸업장 수여
-2009년 11월17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4.19혁명부터 유신 반독재투쟁, 6.10항쟁까지 서울대 출신 ‘민주열사’ 추모 조형물을 돌아보면서 민주화운동의 전통과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주화의 길’을 열었음
-2013년 9월 서울대 내 민주화의 길에 자리잡은 추모수 앞에 열사의 뜻을 알리고 추모하는 추모비 건립(서울대 5동에서 중앙도서관 가는 길 좌측)
4)모란공원 이장 및 추모집 발간 등
-2014년 8월30일, 추모 동지들 뜻을 모아 1987년 군부대에 의해 매장되었던 양주 운경공원에서 27년만에 어머니(본인의 강권으로 자식을 군입대시켜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고 고통스러워 하다 안타깝게 한강에 투신)와 많은 민족민주열사들이 모여계신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이장함
-2016년 2월 10일, 자식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29년 세월을 의문사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자식이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열렬히 활동하던 부친 최봉규아버님 영면, 모란공원에 안장.
-2017년 9월1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짧은 삶을 아낌없이 불태웠던 열사의 삶과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동지들의 추억과,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진실을 밝히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안타까이 죽어간 아들을 찾아 한강에 투신한 어머니의 눈물과 또한 아들의 꿈과 아내가 못다 찾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긴 세월을 민주운동가로 활동하신 최봉규 아버님의 삶과 투쟁을 <최우혁-최봉규 공동 추모집>으로 발간
-2018년 7월 국방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 군의문사로 순직 결정 받음
5)녹화선도공작 의문사유가족 대책위 활동
-강제징집 녹화 선도공작 피해자 단체와의 연대를 통한 의문사 진상규명 시도
-2020년 6월23일 녹화선도공작 의문사유가족 기자회견 및 전두환 등 보안사 관련자 서울중앙지검 고소고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정보공개 청구(국방부)
-8월7일 정보공개청구자료 수령(강집피해자 42명, 의문사8명 중 6명분-최우혁, 이진래 없음)하였으나 대부분 자료 일부 누락(특히 프락치활동 등)
-보안사 자료공개를 위해 국회와 녹화선도공작 피의자 2천명 전원 보안사 존안자료 공개청구 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