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야구기사의 전설’ 천일평 선배, 아니 ‘게찌 성’

1984 LA 데스밸리에서 고 천일평 기자(맨 왼쪽). 익살스럽게 털썩 앉아있는 이(고명진 영월기자미디어박물관장,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 바로 뒤가 필자 김인규 기자
오늘은 야구기자의 전설, 한국일보 천일평 기자가 별세한 지 100일 되는 날이다. 아시아엔은 천 기자의 한국일보 후배인 김인규 기자의 추모글을 싣는다. <편집자>

[아시아엔=김인규 전 한국일보 체육부장, 남미특파원] 천일평 선배. 나는 천 선배가 야구장 기자실의 불사조로 영원히 남아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하늘나라로 도루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런데 고인에 대한 예우로 ‘천일평 선배’라고 부르려니 왠지 부자연스러워 우리 후배들이 평소 부르던 ‘게찌 성’이라는 호칭으로 과거를 한번 추억해보고자 한다.‘게찌’란 “시비를 잘 붙는다”란 일본식 속어로 알고 있다. 우리가 천일평 선배를 ‘게찌 성’이라고 부른 것은 마구잡이로 시비를 잘 붙었기 때문이 아니다. 후배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패막이 시비’를 자처했기에 붙인 별명이다. 그 별명에는 후배들의 존경과 사랑이 듬뿍 들어있다.

2019년 2월 25일 천일평 전 기자(앉은이)가 정운찬 당시 KBO 총재, 신중식 전 국회의원 등과 자리를 함께 했다. 생전 가장 최근 사진이 됐다.

애초 한국일보사에서 지금은 타언론사로 넘어간 일간스포츠와, 그 시절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들은 한때 두 매체에 동시에 기사를 썼다. 같은 사안을 두고 두 신문에 기사를 따로 쓰자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귀찮기도 해 특별한 경우 아니면 먹지를 밑에 대고 원고지를 메워나갔다. 먹지 위의 기사는 일간스포츠용, 먹지 밑 기사는 한국일보 체육면 기사였다. 일간스포츠에 비해 지면이 적은 한국일보 체육면은 먹지에 쓴 긴 기사를 문맥에 관계없이 길이에만 맞게 잘라 지면에 실었다. 이 바람에 어설프게 끝을 맺은 한국일보 체육면 기사를 보고 독자들은 수시로 항의해왔고 우리도 불만이 많았다. 업무량도 자연히 두배 가까이 됐다. 나를 포함한 젊은 기자들은 기사 쓸 때마다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게찌 성이 나섰다.

고명진과 천일평(오른쪽) 

게찌 성은 당시 장강재 회장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여 일간스포츠와 한국일보 체육부를 분리하도록 했다. 오랜 시간 이어져온 회사 방침에 정면 반기를 드는 이같은 건의는 경영주로부터 미운털이 박힐 게 틀림없는 사안이었다. 본인에게는 득 될 게 하나도 없고, 오히려 중견기자가 후배들을 다독이지는 못할 망정 부추긴다는 비난만 들을 일이었음에도 그가 나선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해 전국체전에서 나와 입사동기로 文才가 뛰어났던 윤동혁(지금은 저명 다큐멘터리 PD로 맹활약) 기자가 공식보도자료로 나온 단신소식을 집중 취재, 사회면 톱으로 만들었다. 기사가 나가자 한 언론사 선배가 윤동혁 기자한테 화를 내며 욕설을 했다. “별 볼일 없는 사안을 튀기는 바람에 우리 회사 데스크로부터 엄청 깨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배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타사 선배는 연조가 우리와 너무 차이 나 직접 맞대응하기가 곤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1984 미국 LA 데스밸리에서. 왼쪽부터 <일간스포츠> 서종도 기자, 필자, <한국일보> 최규식 기자, <일간스포츠> 오도광 국장, 천일평 기자, <한국일보> 방석순 기자, 고명진 기자.

이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게찌 성이 비호같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인상을 팍 쓰고 “아니 oo선배, 왜 남의 지면에 난 기사 가지고 시비를 겁니까. 회사에서 욕 먹은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라 판단 잘못한 선배 아닙니까? 사과하십시오.” 게찌 성이 아주 거칠게 항의하자 그 선배는 “아니 그게 아니고···.”라며 우물쭈물하더니 물러났다. 게찌 성은 뒷걸음치는 그 선배가 들으라는 듯 “윤동혁이 기사 잘 썼어. 앞으로도 계속 그런 기사 써” 하고 격려했다. 게찌 성은 후배들 일이라면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서곤 했다.

게찌 성처럼 후배들로부터 완벽한 존경을 받은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 평상시건 술자리에서건 게찌 성을 씹는 후배는 보지 못했다. 한국일보 회사내 게찌 성 선배들도 평소 ‘천일평씨’, ‘천 기자’라고 부르기보다 ‘어이 천 게찌’ 하고 호칭하길 좋아했다. 그들 역시 게찌 성의 게찌 기질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찌 성은 1984년 여름 LA올림픽 한국일보 특별취재단의 실질적인 반장(밝히기 곤란한 사정이 있어 이렇게 표현한다) 역할을 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정말 이례적’으로 회사에서 “우리 신문 올림픽 기사가 가장 뛰어났다. 특별격려금 보낼 테니 일주일 정도 관광하고 복귀하라”고 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는 아침마다 취재계획을, 저녁에는 점검회의를 즐겁고 꼼꼼하게 주재한 게찌 성의 지도력 덕이었다.

그런데 위로휴가가 게찌 성에게는 엄청난 비극으로 다가왔다. ‘데스 밸리’에 들렀다 라스베가스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가 타고 있던 차량이 뒤집히며 몇 바퀴 구른 것이다. 가장 심하게 다친 게찌 성은 응급헬기에 실려 라스베가스 병원으로 이송됐다. 나머지 우리들이 앰블런스로 같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게찌 성은 이미 수술을 마친 뒤였다. 비운의 프로복서 김득구를 수술했다는 라스베가스 일대 최고 명의가 게찌 성을 집도했다. 그러나 그는 수술을 마친 뒤 절망적인 얘기를 우리한테 했다. “최선 다했다. 하지만 생명 보장은 못한다. 설사 기적적으로 산다 해도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한다.”

게찌 성은 이 병원에서 퇴원 뒤 LA에 있는 재활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재활전문병원에서도 걷는 것은 물론이고 휠체어 타기도 불가능하므로 누워 지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게찌 성은 재활병원에서 지내는 6개월간 초인적 의지와 노력으로 막판에는 휠체어를 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재활병원 관계자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놀라워했다. 서울로 돌아온 게찌 성은 휠체어에 만족하지 않고 “목발 짚고 반드시 걷겠다”며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두번째 기적은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다. 게찌 성은 휠체어를 타고 자신이 분신처럼 아꼈던 야구장에 나가 취재하고 심지어는 지방출장까지 가는 불사조 의지를 보여주었다. 형수를 비롯한 가족들 노력과 헌신이 뒷받침됐지만 본인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치료를 받고 반드시 내 두발로 걸어다닐 거야.”

나는 미국생활 20년을 정리하고 2020년 11월 중순 귀국, 영월에 정착했다. 얼마 뒤 원주에 사는 윤동혁 피디와, 원주 장날에 게찌 성 부부가 오기로 했으니 오랜만의 해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게찌 성이 몸이 안 좋아 다음 기회로 미뤘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상경하겠다고 미루다 게찌 성 못 뵙고 떠나보낸 게 한이 된다. 아들 바우, 딸 꽃님이에게 더없이 자상하고 엄격한 아버지, 형수에게는 든든한 남편으로 살았다. 불편한 몸으로도 손주들 돌보며 보통의 건강한 할아버지 노릇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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