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영웅적 청춘’ 신성일, 한국영화 중심에 영원히 남을 것

신성일(오른쪽)의 데뷔작 로맨스빠빠. 왼쪽은 김승호,

[아시아엔=전찬일 <아시아엔> 대중문화 전문위원, 영화‧문화콘텐츠 비평가] 명색이 25년차 영화평론가이긴 하나, 고 신성일 선생과 딱히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2016년 12월 9년간 몸담아 왔던 부산국제영화제를 완전히 떠나기 몇 개월 전, 김동호 당시 부산영화제 이사장과 전양준 현 집행위원장과 함께 인사동에서 회고전 관련 회동을 하며 인사를 나눴고, 이러저런 행사에서 몇 차례 의례적인 인사들을 나눈 것이 전부다.

2012년 재단법인 한국영화복지재단이 발간한 <영원한 청춘배우 엄앵란> 중 ‘신성일, 특유의 생명력으로 세월을 이겨낸 거대한 배우’에서도 밝혔듯 신성일은 그러나 나의 영화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절대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가 안인숙 등과 호흡을 맞춘 신예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이 영화를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의 세계로 비상시켰고, 나로 하여금 향후 영화평론이란 험난한 길을 걷게 하는 문제작이기 때문이다.

‘별들의 고향'(1974)의 신성일과 안인숙. 이 영화는 중학생 전찬일을 영화평론의 길로 이끌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교복 차림으로 들어가 동네 3류극장에서 조우한 그 기념비적 멜로영화는 내 인생의 일대 사건이었다. 초등생 시절부터 김기영 감독, 남궁원 전계현 윤여정 주연의 <화녀>(1971) 같은 ‘18금 영화’도 수시로 보곤 했던, 까질 대로 까진 어린 관객에게 극 중 주인공 경아와 문호가 나눴던 그 유명한 ‘최후의 정사’는 영화를 욕망의 투사장으로 각인시키면서, 나로 하여금 연기의 세계에 전격 눈을 뜨게 했다. 그 중심에 스타-연기자 신성일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 이후로 지금껏 신성일 그는, 한국영화만이 아니라 한국 연예‧문화계, 더 나아가 한국사회 전체의 전무후무한 엔터테인먼트 스타로 내 심상에 머물러 있다. 동의 여부에 아랑곳없이, 대한민국의 스타 역사는 ‘신성일 이전’과 ‘신성일 이후’로 나뉜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확신이다.

그 확신은 앞의 나의 원고 ‘신성일, 특유의 생명력으로 세월을 이겨낸 거대한 배우’로부터 6년여 흘러, 지난 10월 작성한 원고에서도 여전하다. 영화진흥위원회 주최,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조혜정)·한국영화학회(회장 정태수) 주관, 한국영화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이장호·장미희) 후원으로 지난 10월 26일 서울 리버사이드호텔에서 열린 세미나 ‘한국영화 99주년, 100년의 문턱에서: 한국영화의 기원, 표상, 비전’에서 발표한 ‘한국영화 100년, 시대의 변천과 남성 인물의 자화상’에서 필자는, 나운규를 필두로 김승호·김진규·신영균·안성기 & 박중훈·한석규·송강호·최민식·이병헌과 함께 신성일을 한국영화 제작 100년의 자화상을 대표하는 ‘스타성을 넘어 시대의 얼굴을 담은 남성 배우’로 선정했다.

그때 필자는 신성일에 앞서 신영균(申榮均, 1928~ )을 ‘한국영화의 남성 아이콘’이라 규정한 바, “‘아이콘적’이기는 ‘한국영화의 영원한 아버지’ 김승호의 또 다른 아들 신성일도 매한가지”라고 진단했다. ‘비교 불가의 스타 아이콘’으로서 말이다! 결국 그때 그 원고는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스타이자 연기자였던 배우 신성일을 추모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추모사를 대신해 1주일 전 발표한 원고를, 필요에 따라 다소 보완·수정해 여기 옮긴다.

신성일은 우선 영화편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총 535편의 필모그래피를 ‘자랑’한다. <배우 신성일>의 필자 김종원이 ‘신성일의 연기와 작품세계’에서 적시했듯, “세계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김종원도 그렇고 또 다른 필자인 김두호(‘무비스타의 전설이 된 신성일의 삶과 연기’)도 그 편수와 관련된 일화를 전하는데 원고의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다.

신성일은 연극무대를 거쳐 영화계로 뛰어든 김진규나 신영균 등과는 달리,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로맨스 빠빠>로 전격 데뷔한다. 김종원에 따르면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로 세간의 주목을 끌면서 그 여세를 몰아, 1963년 한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그해 총 제작편수 148편)에 주연으로 기용되더니, 1970년까지 7년간 매년 출연 편수를 늘려 나간다.

1964년 <맨발의 청춘> 등 32편(총 137편), 1965년 <흑맥> 등 34편(총 161편), 1966년 <초우> 등 46편(총 172편), 그리고 1967년에는 <안개> <원점> <까치소리> <일월> 등 51편(총 185편)으로 최다 출연기록을 세운다. 이후 1968년 70밀리 영화 <춘향전>을 비롯해 45편(총 195편), 1969년 <시발점> 등 44편(총 229편),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 등 46편(총 231편)으로 “안정적인 40편선을 유지하였다.”

이후 <잃어버린 계절> 등 29편(총 202편)에 출연한 1971년을 고비로 1972년 <작은 꿈이 꽃필 때> 등 22편(총 122편), 1973년 <이별> 등 20편(총 125편), 1974년 <별들의 고향> 등 18편(총 141편)으로 “하향추세를 보였다.”

1975년 이후로는 많게는 1977년 <겨울여자> 등 8편, 1979년 <도시의 사냥꾼> 등 9편에서 적게는 1983년 <3일 낮 3일 밤> 1편 등 출연 편수가 대폭 줄긴 했으나,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이장호 감독의 <낮은데로 임하소서>, 이두용 감독의 <장남>(1984), 박철수 감독의 <어미>,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 1986년 대종상 남우주연상 수상작 <달빛 사냥꾼>(신승수), 1987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수상작 <레테의 연가>(장길수) 등이 80년대 영화들이다. 그의 활약상은 90년대까지 이어져 또 한 차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안은 <코리안 커넥션>(1990) 등 4편을 비롯해,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등 4편, 1992년 <눈꽃> 등 3편, 1995년 <아빠는 보디가드> 등 2편을 남겼다. 그리고 1993년(망각 속의 정사), 1994년(증발), 1996년(축제), 1998년(까)에는 각 1편씩을 남겼다.

이렇듯 신성일은 데뷔 이래 38년에 이르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500편 넘는 다작을 선보였다. 그 가운데 대다수는 주연 출연작이다. 1997년 한 해를 제외하고 거의 쉼 없는 행군이었다. 기록적 다작 속에 그와 같은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쳤다는 것은 한국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한, 신성일 그만의 독자성이라 평하지 않을 길 없다.

김두호가 “톱스타 신성일의 생애는 우리 영화사의 신화이며 전설이다. 주인공이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영화팬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는 감회로 자신의 논고를 끝맺음한 것은 결코 김두호만의 감상이거나 과장이라 할 수 없다.

신성일은 <야관문 : 욕망의 꽃>(2013, 임경수)에 출연해 다시금 노익장을 과시했으나, 비평에서는 물론 흥행에서도 대참패를 맛봐야했다. 80대 초반의 그는 폐암 3기로 투병중에도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 신성일 아니면 도저히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그 소란의 와중에도 2017년 자신에게 회고전의 ‘영예’를 안겨준 부산영화제에 ‘의리’를 지키고, 후배 영화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을 터다. 한국영화사의 최고‧최장 스타로서 자신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더러는 애정 어린 비판까지 보내온 팬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도 있었으리라.

내게는 2018년 10월 4일, 단 한명의 부산 개막식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다. 그날 그는 내게 ‘이미지’와 ‘기호’로서 스타의 진면모를 새삼 확인시켜줬다. <별들의 고향>의 감독 이장호와 더불어, 생물학적으로는 나이가 들어도 기질적‧정서적‧심리적으로는 ‘영원한 청춘’으로 머물러 있는, ‘불가사의한 영화청년’···.

신성일의 영화인생에 참패를 안겨준 ‘아관문'(2013). 5년이 흐른 2018년 10월 4일 부산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을 당당히 걷던 그의 모습에서 실패와 좌절이라곤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경외로워 때론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던 게 그의 삶이었다.

신성일의 영화인생에 참패를 안겨준 ‘아관문'(2013). 5년이 흐른 2018년 10월 4일 부산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을 당당히 걷던 그의 모습에서 실패와 좌절이라곤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경외로워 때론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던 그의 삶이었다.

이제 ‘스타 신성일’에 대해 말해야겠다. 남용, 오용 등으로 스타의 의미가 무의미해진 이 시대에도, 신성일은 종종 스타/덤(Star/dom)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곱씹게 하곤 한다. 이미지와 기호로서의 스타는 말할 것 없고 ‘문화자본’, ‘사회적 현상’ 등으로 신성일만큼 완벽히 ‘스타’에 부응하는 인물은 없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바야흐로 BTS로 축약돼 통용되고 있는 월드스타 방탄소년단까지 포함해서도 마찬가지다.

스타의 속성 중 하나가 그 단명성이라고 할 때, 대한민국 역사에서 신성일에 견줄 스타는 부재해왔다(는 게 수십 년간 유지돼온 내 주장이다). 내게 스타를 딱 한명 대라면 나는 언제나, 주저 없이 신성일을 들어왔다. 신성일과 심심치 않게 비교되는 알랭 들롱이나, ‘스타의 화신’이라 할 제임스 딘이 아니었다.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의 바로 그 증거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종원은 단언한다. “한국영화 사상 신성일만큼 장기간 스타 지위를 누린 배우는 없었다. 그는 영화 전성기의 물꼬를 튼 1960년대 후시(後時) 녹음 시대에서 산업화로 전환한 1970년대까지 근 20년 정상을 지킨 유일한 존재였다”고. “신성일에게 스타라는 대명사는 남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명예’이자 스스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멍에’였다. 오늘날 한류 붐을 타고 있는 몇몇 인기스타와 비교하더라도, 그가 일찍이 1960년대에 누린 명성은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유지나도 ‘스타 페르소나 신성일 : 로맨틱 가이와 루저를 가로지르는 탈주자’에서 말한다. “1960년대 이후 지배적인 장르 영화의 급부상과 스타-캐릭터로서 신성일은 분리하기 힘들다···. 그가 표상하는 신선한 매혹, 즉 김진규와 최무룡의 그것과 분절되는 남성 섹슈얼리티의 경지는 분명 이전보다 노골적인 육체의 미학과 만난다”고. “내면의 아우라가 외면까지 장악하는 남성 배우를 대표한다”는 “김진규나 최무룡을 딛고 혹은 그들의 스타성 속에 차세대로 등장한 신성일은···외면의 화려함이 영화 매체 고유의 시각적 쾌락에 딱 들어맞는 남성 섹슈얼리티 미학을 전면화시킨다···그가 데뷔하며 스타로 주가를 날리던 시대, 그러니까 서구화와 근대화를 동일시하며 경제개발을 모토로 삼은 시대와 그의 외모적 조건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한 사회의 역사는 그 사회가 낳은 영화스타들로 쓰일 수 있을 것이라는, 레이먼드 더그넷의 진단을 수용한다면, 스타 기호로서 신성일은 근대화 프로젝트로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과하는 한국 사회사의 표상으로 작동하기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다.”

정진우 감독은 표사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 전성기 시절, 여성팬들의 우상은 바로 신성일이었다···신성일과 가장 많은 작품을 함께한 영화감독으로서 특히 <초우>(1966)가 기억에 남는다. 배우 신성일을 청춘스타로 만든 영화가 아닐까 싶다. 그렇더라도 당시 신성일을 톱스타로 탄생시킨 가장 중요한 영화는 단연코 <맨발의 청춘>(1964)일 것이다. 신성일은 다른 한국 남자배우가 보여주지 못했던 댄디하면서 모던한 새로운 남성상을 이 영화에서 보여주었다.” 이렇듯 내게 신성일은 스타의 이름이고, 스타의 얼굴, 몸이며, 스타의 아이콘이다. 예나 지금이나.

‘신성일, 특유의 생명력으로 세월을 이겨낸 거대한 배우’에서 피력했듯 불가사의한 것은 그 지독한 소모적 다산성의 와중에도, 오늘날의 눈으로도 인정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적 수작들에서 그만의 캐릭터들을 창조해냈으며, 두고두고 회자될 열연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신성일 자신이 최고작으로 뽑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를 비롯해, 김승옥의 걸작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의 <안개>(1967), 뒤늦게 발견돼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그리고 배우 신성일의 터닝포인트적 출세작이자 신성일-엄앵란 커플을 탄생시킨 청춘영화의 대명사 <맨발의 청춘>(1964, 김기덕) 등이 그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위에 선 신성일(2018 10 4)

나는 그 영화들에서 배우 신성일이 발산하던 그 모던한, 혹은 포스트모던한 연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 어느 일본영화를 베꼈다 해도 상관없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비디오테이프로 다시 본 <맨발의 청춘>에서의 서두수, 신성일은 트위스트김과 더불어 가히 ‘발견’이라 할 만했다. 그래 어느 지면에 당시의 감흥을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그들은 현재의 눈으로 보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활기 넘칠 뿐 아니라, 그에 그치지 않고 지극히 현대적 연기를 펼친다. 지금껏 60년대 영화들을 보면서 맛보지 못했던, 70년대 이후의 숱한 영화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현대적 연기를. 도대체 그 모더니티는 어디서 비롯된 건지, 난 이 영화가 60년대 산(産)이란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고인이 된 신성일. 그는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한국영화 역사의 ‘영원한 반-영웅적 청춘’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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