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이민 60년①] 미국 이민 반세기 절반의 성공?
시카고 이민 60년, <아시아엔>은 미국 한인사회의 현주소를 몇 차례에 걸쳐 싣는다. 필자인 김정일 해설위원은 20대에 미국으로 이민 가 40년 이상 <미주한국일보>와 <시카고기독교방송>에서 취재와 칼럼 기고, 방송해설 등을 하고 있는 베테랑 언론인이다. 필자는 이번 ‘시카고 신명기’를 통해 미주 이민의 현실을 냉철한 시각으로 분석하며, 대안 모색에 나설 예정이다. <아시아엔>은 시카고 이민 60년과 바이든 정부 출범을 계기로 미주 한인사회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독자들의 애독과 질정을 바란다. <편집자>
‘시카고 신명기’···“난 열심히 살았어!” vs 천사와 악마의 투쟁
[아시아엔=김정일 <시카고기독교방송> 해설위원] 우리가 시카고로 이민 온 지 반세기를 훌쩍 넘어 60년이 지나게 됐다. 시카고 이민 60년, 모세의 광야가 40년이었다. 신명기는 신의 견해를 제시한 모세의 설교이기 때문에 인간적 견해와 비교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모세의 광야 40년 회고는 교훈적이다. 이 글은 시카고 이민 60년에 대한 고뇌와 아쉬움의 회고, 진지한 자기 성찰, 그리고 애정을 동반한 미래의 조망을 위한 것이다.
1. “난 열심히 살았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거야?” 누구든 삶의 한 시점에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볼 때가 있다. 제2의 이민물결이 1970년대 초에 시작됐으니까 지금 우리가 미국에 이민한 지 반세기를 훌쩍 넘어 60년이 지나게 됐다.
과연 한인들의 미국 이민은 성공적인가? 한번 중간결산을 할 때가 됐다. 지금 미국의 한인 이민사회는 고령화되어있고, 새 이민은 오지 않고, 2세 3세는 한인사회를 떠나고, 심지어 한국말 세대인 30대, 40대, 50대조차 커뮤니티를 떠났다. 마치 이민 1세들이 빈 둥지(Empty nest) 속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지금 새로운 자성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조 섞인 푸념도 있다. 그러나 늙어버린 이민 1세에게는 한 평생을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살았다는 1)자긍심 확인의 욕구가 있다. 한 평생을 ‘잘 살아 보겠다’(The pursuit of better life)는 치열하고 고독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30~50대들에게는 앞으로, 2)살아야 할 날이 많이 남아있다. 이들이 아무리 개인주의적인 생활태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모든 현상을 동류집단의 기준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잘 났든, 못났든 이들도 Asian 또는 Korean으로 분류된다. 지금이라도 미흡한 생활태도를 개선한다면 우리가 이 복잡하고, 다원적이고, 양극화된 미국에서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2. 미지의 항로
우리들의 미국이민은 ‘미지의 항로를 향한 항해’(Uncharted sailing)였다. 이 항해는 애초부터 무경험으로 서툴고 위험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항로는 다양성과 복잡성으로 이해가 어려웠고 이념과, 인종과, 지역과, 리더십에 따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 왔다. 따라서 단일민족으로 5000년을 조그만 반도에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이 사회는 우선 넓고 복잡하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반면 우리는 좁고, 단순한, 폐쇄적인 사고의 틀 안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습득’의 노력도 하지 않았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도 터득하지 못했다. 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본질서와 룰’을 이해하는데도 서툴렀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우리 고유의 근면, 성실의 문화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미국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사후에 고향에 묻히겠다는 사람은 20%에도 미달했다. 귀소본능이라는 과학이 통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문화적으로 열악하고, 경제적으로 낙후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지금 이민 60년차에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민생활 성공여부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주관적이다. 부자도 많고, 빈자도 많다. 이 사회의 모든 현상이 보수, 진보의 잣대에 따라 크게 다르고, 지금은 이 현상이 양극화라는 단어로 표현이 되듯이,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나 생활태도도 주관에 따라 당연히 다를 수 있다.
누군가가 ‘나는 아직도 화씨보다 섭씨로 해야 느낌이 있고’, ‘내게는 한국의 촛불과 태극기가 내 자신이 영향권 내에 있는 인종주의나 병원 가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잘못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이나 태도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미국에 평생 살면서 영어는 내 언어가 아니고, 한국말이 내 언어라고 믿는 사람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평생을 언어장애자처럼 살아야 하고, 어디에서든 국외자의 신분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혜의 차이가 현실의 차이를 만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