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앞둔 美한인사회②] 세련된 인종차별 딛고 1등시민 진입하려면

[아시아엔=김정일 <시카고기독교방송> 해설위원] 우리 2세들이 사회 상층부에 진입하지만, 내부경쟁에서는 밀리고 있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더 위험한 차별도 있다. 우리 커뮤니티가 도매금으로 2등시민이 될 수도 있다. LA폭동 때 주 방위군이 한인사회의 인명과 재산 보호를 일주일 동안이나 외면하고, 폭동이 부자 동네로 번지는 것을 막기만 하고 있었다. 2등시민 그룹에 대한 명확한 차별이다.

요즘 교외지역의 인종차별은 더욱 세련(?)되어 있다. 버논 힐 고교(Vernon Hills High School) 베어스(Bears)의 전 유명 흑인선수 데스먼드 클라크(Desmond Clark) 가족의 케이스다.

일리노이주립대 사회학 교수 아멘다 루이스(Amenda Lewis)는 “교외 지역의 인종주의는 포착도, 증명도 힘든 매우 미묘한(subtle) 형태를 띠고 있다”며 “가령 소수계 학생들을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키거나 교칙을 위반할 때 다른 학생들에 비해 엄한 벌을 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고 말했다.

루이스 교수는 “교직원들의 무의식 속에는 소수계를 경시하는 태도가 일상화돼 있다”며 “자녀들이 학교에서 받는 인종차별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오는 것들”이라고 분석했다.

3. 고정관념과 편견의 출발점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주류사회의 굴곡된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스스로가 고립화 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과연 반세기 동안 살아오면서 우리가 주류사회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자성해야 한다.

여기에는 또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외부 요인으로는 주류 및 다수그룹이 이민자와 소수그룹에 대해 벌이는 차별이다.

1)먼저 외부적 요인을 보자. ‘조용한 소수, 보이지 않는 아시안’(Silent minority, Invisible Asian)이란 말이 있다. 워낙 소수라 잘 보이지도 않지만, 소수이면서 조용하기까지 하니까 존재 자체가 쉽게 무시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차별을 받는 치명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문화전쟁(Cultural War)를 들 수 있다. 백인의 유럽문화와 여타 문화권(열등문화라고 간주되는)과의 충돌을 말한다. 일부 보수계 정치인들이 ‘English Only’ 정책을 주장하고, 주류 언론들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민사회를 ‘Alien’ ‘Foreigner’ 등으로 지칭했다. 한마디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경계심과 차별심이 공공연히 자행된 것이다.

2)내부적 요인은 우리 자신이 이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설명된다.

첫째 ‘의식의 쇄국정책’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고립화시키는 현상으로 수십년간 한 커뮤니티에서 거주하고, 사업하며, 자녀들을 학교 보내면서도 이웃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살기’에 미숙한 태도로 수천년간 단일민족으로, 천년 가까이 유교문화에 젖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둘째, 모국 지향적인 태도가 원인이 되고 있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의 선거 △독도 및 동해 문제 △위안부 문제 △이산가족 같은 모국의 이슈에 매달리는 모습은 주류사회에서 보기에 영락없는 외국인의 모습, 그것이다. 이런 이슈들 중 일부는 사실상 모국에서도 메인 이슈가 아니며 다분히 이념적, 정치적인 이슈일 경우가 많다. 미국에 사는 한인사회의 이슈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의 이슈는 따로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셋째 ‘총독부적 영사관’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미 영사관이 미국의 한인사회를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는 식민지 백성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사건건 영사관이 우리를 대표하고, 마치 ‘빅보스’인 양 행세하고, 간섭하는 것은 한인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편견과 고정관념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외국인, 국외자의 이미지’다. 영사관은 바로 우리가 경계하는 이것들을 더 조장하고 있다. 주류사회가 시카고 한인사회를 외국인 집단으로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이 사회의 국외자, 뜨내기, 외국인으로 보이게 만드는 문제들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의 시발점이며, 우리의 자존을 해치고 있다. 2세들에게 보이지 않는 유리창의 장애물을 던져주며 마침내 우리를 2등시민으로 전락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4. 체념과 타협의 허상

이민 1세 사회는 “누구나 항상 그래 왔다”는 체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21세기를 사는 이들의 모습이 아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가져오는 위험한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패배적인 타협이다.

세상은 눈부시게 변하고 있다. 수천년 낙후된 문화권에 살아온 아랍권에 ‘Arab Spring’이 다가온 지가 벌써 수년이 흘렀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아를 통한 인류의 변화는 강력하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의 덕목이 긴 인류사 속에서 가장 강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편견과 고정관념의 배경은 ‘them and us’의 매우 파괴적인 논리다. ‘우리’와 ‘너희들’이 다르다는 분열적 논리 즉 너희들은 우리의 소속이 아니라는 자기 우월성의 논리다. 이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힘 있는 자의 힘 없는 자에 대한, 가진 자의 못 가진자에 대한 횡포다. 이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집단적인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

체념과 타협은 미국의 가치와 원칙에도 어긋난다. 우리는 행복추구의 권리를 신봉한다. 1776년 독립선언문에는 “창조자가 부여한 양보할 수 없는 권리” 즉 “Life, Liberty, and pursuit of happiness” 행복추구의 권리다. 차별을 거부하는 이유다. 헌법과 민권법은 모든 미국시민의 동등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삶’과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서 수천년 살아온 땅을 뒤로하고 신대륙을 찾아왔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태도를 배격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자존의 표시이고, 정당방위다.

5. 다른 소수계 커뮤니티의 공통적인 주요 이슈들

이미 다른 소수계들은 주류사회와의 균형 잡힌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때로는 투쟁을, 때로는 화합을, 때로는 참여를 꾀하는 지혜를 오랫동안 보여왔다. 우리의 권리와 의무는 전적으로 미국에 달려 있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적응과 동화의 수준에서 앞선 그룹이 경제사회적으로 앞선다는 것은 다문화사회의 상식이다. 소수계의 주류사회 진입은 절대적인 목표이며, 이를 위한 장애물 제거는 절실하다.

흑인, 히스패닉, 유태계들은 물론 중국, 일본 등 다른 아시안 이민그룹들이 천명하고 있는 공통적인 주요이슈들을 대별하면 아래와 같다.

1)Pluralism(다원주의에 대한 계몽): 미국사회는 태동기부터 백인이 다수였지만,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사회로 줄곧 존재해왔다. 마치 샐러드 그릇(Salad bowl)처럼, 그 안에 상추, 토마도, 당근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소량의 후추가루나 올리브 오일도 함께 있어야 멋진 샐러드가 나온다. 소수라는 숫자개념보다 다양성이라는 장점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 다원주의를 계속 주류사회에 상기시키고 계몽하는 시도를 한다. 예를 들면, 유태인이 머리에 야마카를 쓰고 있어도 이상하게 보지말라는 주문이다. 이것도 엄연히 미국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교육하는 것이다. 아시안을 보면 무조건 외국인이라고 보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교육이다. 아시안이 미국에 산 지 2세기가 다 되었다. 소수이며 이질적이라는 개념이 비미국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교육, 계몽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미국의 일부이고, 다양성이라는 얘기다.

2)Human Right(민권 보호): 민권의 존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미국헌법은 모든 국민의 동등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민권법은 구체적으로 “모든 시민은 인종, 민족, 출신국, 교육, 성별에 관계없이 차별받지 않는다”고 명기하고 있다. 민권보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며, 만일 이를 해칠 경우 투쟁하겠다는 메시지다.

3)Xenophobia(외국인혐오 배격): 서로 다른 것에 대한 혐오감정은 인간 본성의 하나다. 그러나 다수가 소수를 혐오하면 이것은 폭력이 된다. 아프리카, 중동, 발칸반도…여러 지역에서 이 혐오감의 폭력화로 끔직한 대규모 유혈 인종청소 사태가 난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1999년 바로 인디아나에서 벌어진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한 한인 윤원준씨 살해사건이 좋은 예다. 이런 사악한 집단적인 혐오감정을 배격한다는 선언이다.

4)Racial Discrimination(인종차별에 대한 투쟁): 미국의 인종차별 역사는 선명한 기록을 갖고 있다. 아직도 이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차별이 존재한다. 람 이매뉴엘 시카고 시장은 “인종주의는 일리노이에도, 시카고에도, 시카고 경찰 내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시 경찰에 대한 특위의 조사 끝에 나온 이야기다. 경찰의 인종차별적인 업무수행에서 아시안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형태의 차별이든지 이를 배격하고 투쟁한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5)Participation(참여의 약속): 대부분의 소수계들은 사악한 것에 대한 투쟁과 배격을 다짐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의 화합과 발전을 위한 공헌과 참여를 약속하고 있다. 한인 밀집지역 중 하나인 글렌뷰에서 몇년 전에 도서관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역사회로부터 헌금을 조성했었다. 당시에 한인사회로부터의 참여가 하나도 없었다고 개탄하는 관계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끼리끼리 모여서 집안잔치만 벌이고 있을 때, 우리가 거주하는 지역사회에서는 우리의 무관심을 섭섭하게 여길 것이다. 참여해야 대접과 인정을 받는다.

6)Human Relations(인간관계 조성): 시카고 시청이나 일리노이주에는 인간관계를 높이기 위한 커미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주하고, 사업을 벌이며,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교외에는 아직 이런 조직이 드물다. 우리가 이제는 좀 영리해져야 한다. 지역사회 참여와 화합을 위해 인간관계를 높일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 조성을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일회성 이벤트에서 탈피해 지속적인 시스템을 만들 때가 되었다. 소수계들은 각 그룹 간의 인간관계를 넓히고 이해를 높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7)Inter-Group(다른 커뮤니티와의 교류와 소통): 다양성의 미국사회에서 우리는 될수록 많은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4반세기 전 ‘4.29 폭동’이 난 후 한인사회의 고립현상이 문제점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이슈는 지금 완전히 실종되어 있다. 엄청난 피해를 당한 후에 우리가 고작 한 일은 거리시위와 로스엔젤리스 시청 앞에서 사물놀이 북을 일주일 친 것이 전부다. 당시에 <ABC News>의 앵커 테드 카플과 방송 설전을 벌여 유명해졌던 엔젤라 오 변호사는 한인들이 다문화사회인 미국에서 사는 법을 너무 모르고 있다고 개탄했다. 지금도 우리는 이 지혜를 터득했다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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