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가을 햇살에’ 박노해

오늘 구름 속으로 보름달이 보인다고 기상청은 예보했다.

나의 날들은 다 어디로 갔나
나의 길들은 다 어디로 갔나
나의 벗들은 다 어디에 있나

즐거운 만남도 설레는 여행길도
함께 모여 담소하고 슬퍼하고 격려하던
우리 인생의 날들은 다 어디로 갔나

가을이 온다
그래도 가을이 온다

긴 먹구름과 암울한 공기를 뚫고
노란 산국화는 향기를 날리고
들녘의 벼들은 서로를 어루만지고
사과알은 햇살에 볼이 붉어지고
가시를 벗고 툭 알밤이 한번 웃고

그래도 가을이 오는구나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오는구나

비상계엄 같은 세계 속에서도
진실하게 살고 사랑한 사람들
버려야 할 것을 단념하고
지켜야 할 것을 품에 안고
함께 앞을 보며 이어져온 사람들

관계만 튼튼하면 우리는 살 수 있다
사람만 신실하면 반드시 때는 온다
근본만 굳건하면 꽃피는 날은 온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다 관계에서 오니까
인생의 절망과 희망은 다 관계에서 오니까
세상 어디에 있든 그 어디에 있든
관계만 튼튼하면 우리는 살 수 있다
관계만 깊어지면 우리는 다시 산다

가만가만 걸어오는 가을 햇살에
가을볕에 익어오는 붉은 볼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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