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열전①] 동독 ‘스파이 대부’ 마르쿠스 볼프

마르쿠스 볼프 <사진 연합뉴스>

[아시아엔=김중겸 치안발전포럼 이사장, 전 경찰청 수사국장] 34년 동안 구동독 대외첩보기관 HVA(정보수집관리본부)의 장관으로 일한 마르쿠스 볼프(1923-2006)는 첩보사에 자신의 이름을 굵직하게 새긴 인물로 서쪽 관계자들을 전율케 만들었다.

유대인인 볼프는 나치가 정권을 잡자 박해를 피해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소련 침공 때는 중앙아시아로 피난을 갔는데 당시 열여섯이던 그는 독일공산당 소년단에 가입해 간첩훈련을 받았다. 그는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독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스물아홉 살에 HVA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동독이 붕괴될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동독의 첩보조직을 이끌었다.

동독이 붕괴된 지 수많은 날이 흘렀지만 아직도 입에 오르내리는 성공사례가 많다. 그중 하나가 기욤공작이다. HVA는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출신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 1927-1995)을 스파이로 만들었다. 그는 ​브란트 수상의 보좌관이 되었고 수상이 기밀문서를 읽고 나면 ​볼프도 매일 사무실에서 그 기밀문서를 읽었다. 그 기밀이 볼프에게 보고되었음은 물론이다.

서독 정치경제 체제에 의문을 품은 학생들을 포섭하기도 했다. 그들을 나토에 취직시켜 1급비밀을 송두리째 빼돌렸다. 돈에 궁한 미 국가안전보장국 베를린 요원을 매수해 도청 리스트를 입수했기도 했다. 독신의 서독 연방정보국(BND) 여성 분석관에게 볼프의 부하가 접근해 13년 동안이나 연인관계를 지속했고 그렇게 정보보고서가 동독으로 넘어갔다.

마르쿠스 볼프

마르쿠스 볼프는 “첩보기관은 수도원이면서 수도원이 아니라”고 했다. 노출은 금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격리되어 수양이나 하고 있는 곳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인간의 약점을 파고드는 더러운 일이기에 첩보요원은 고민도 많고 배신과 변절도 다반사라는 것이다. 신원을 노출하지 않는 수도원풍의 방식도 그래서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볼프에게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초일류 첩보기관을 만들고 유지했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볼프 자신은 “사회주의국가 동독의 붕괴를 방관해야만 했던 상황이 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듬해인 1986년 HVA에서 물러났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된 다음 해에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었는데 중형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금고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나 언론을 통해서나 34년에 걸친 활동에 대해서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고 모두 자신의 가슴에 품었다. HVA에 협조했거나 부역했던 사람들은 그가 기소되면서 사면초가에 몰렸으나 볼프가 끝까지 함구함에 따라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러나 그 안심도 한순간. 볼프는 함구했지만 알음알음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재판받을 때까지 볼프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재판정에 나서고야 비로소 볼프의 얼굴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야 성공한 스파이이며 실패한 스파이만이 이름과 사진과 무용담이 나돈다고 한다. 볼프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실패한 스파이일까, 성공한 스파이일까.

마르쿠스 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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