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몸속에 남은 총알’ 박노해
동강 초등학교 후문 옆 전파상 김점두 아저씨
검정 물들인 야전 점퍼에 끈 없는 낡은 군화를 신고
어둑한 책상에 앉아 라디오를 고치던 말없는 아저씨
그 책상 옆 나무의자에 나 오래 앉아 있곤 했었지
신기한 기술 때문도 낡은 시집 때문만도 아니었지
어린 내가 그에게 홀딱 반한 것은
지리산에선가 맞았다는 총알이
그의 몸속에 아직 박혀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지
동작을 바꿀 때면 한 손으로 가슴께를 지그시 누르며
슬쩍 찡그리는 미간의 그 표정 때문이었지
그는 늘 홀로였고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없었지
유리창 밖에서 보면 그는 라디오를 고치거나
책을 읽고 있다가 싱긋 고개를 끄덕하곤 했었지
그 책상 옆 의자에 앉아 있다 돌아온 날이면
꿈속에서 내 가슴에 타앙, 총알이 들이박히고
나는 붉은 피를 떨구며 눈보라 치는 설원을 헤매다
어김없이 요 위에 지도를 그리곤 했었지
서울로 올라와 수배자가 되어 쫓기던 어느 날
나는 못 견디게 그리워 고향으로 숨어들었지
달 그림자를 밟으며 찾아가 멀리서 바라볼 때
불 꺼진 그 가게는 분식집으로 변해있고
그는 뒷산 응달진 자리에 잠들어 있었지
묘비도 없는 무덤 그의 가슴께쯤엔
진보랏빛 엉겅퀴 한 송이 피어 있었지
나는 말없는 김점두 아저씨를 말없이 좋아했고
자신의 몸속에 총알이 남아 있는 사람을 좋아했지
전선의 총알이건, 사랑의 총알이건, 시대의 총알이건,
동작을 바꿀 때마다 몸속에서 아파져 오는 총알 하나
자신을 현실에 맞춰 변경시키려 할 때마다
깊은 통증을 전해오는 가슴에 박힌 총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