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바라춤’ 신석초 “제가 제 몸을 얽는 관능의 오랏줄이여”

바라춤 <출처 일공스님>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레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장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나려가겄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접동새, 우는 접동새야.
네 우지 말아라.
무슨 원한이 그다지 골수에
사무치길래
밤중만 빈 달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느니.

이화(梨花) 흰 달 아래
밤도 이미 삼경인 제
승방에 홀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나니
시름도 병인 양하여
내 못 잊어 하노라.

아아, 속세의 어지러운 진루(塵累)여.
허울 좋은 체념이여
팔계(八戒) 게송이 모두 다
허사런가
숙명이 낳은 매혹의 과실이여.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내 꿈꾸는 혼의 슬픈
심연이 있어라.

다디 단 꽃잎의 이슬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애끓는 여울이여
길어도 길어도 끊이지 않는
가슴 속의 샘물이여.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눔비니 밝은 구슬성도
이루지 안 했으랴.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수미 높은 뫼도 아니
이뤘으랴.

눈물이 흘러 이내 흔적이
없으니
내 그를 애달퍼하노라.

아아, 헛되어라 울음은
연약한 속임이여.
수유에 빛나는 거짓의 보석이여.
내가 호숫가에 쓸쓸히
설레는 갈대런가
덧없는 바람 달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값싼 시름의 찌꺼기여.

적멸이 이리도 애닯고나.
부질없는 일체관념(一切觀念)이여.
영생의 깊은 수기(授記)가
하마 허무하여이다.
관념은 모두 멸하기 쉽고
잠든 숲속에 세월이 흐르노라.

어지러운 윤회의
눈부신 여울 위에
변하여 가는 구름 연기
시간이 남긴 사원 속에
낡은 다비만 어리나니
세월이 하 그리 바쁜 줄은 모르되
멎는 줄을 몰라라.

덧없이 여는 매살한 손이여.
창 밖에 피인 복사꽃도
바람 없이 지느니
하물며 풍상을 여는 사람의
몸이야 시름한들 어이리
오오, 변하기 쉬운 꽃여울이여.

내 아리따운 계곡에 흐느껴
우는 소리
내 몸 잔잔한 흐름 위에
홀연히 여는 전이(轉移)의 물결 위에
내 끝내 지는 꽃잎으로 허무히
흘러 여는다.

다만 참된 건 고뇌하는
현유(現有)의 육신뿐인가.
순간에 있는 너 삶의 빛깔로
벅차 흐르는 내 몸뚱어리.

순수한 욕구로 불타오르는
꽃송아리
황홀히 타는 구슬의 꽃술 속에
망령된 시름하는 나비들은
금빛으로 날아
빗발처럼 쏟아지느니.

깊은 산 유리 속에 홀로
선 내 모습이
하마 청산의 허재비 같으니다.

장근 동산이 날 에워
한 조각 여는 구름모양
저 영을 넘지 못하는다
내 안에 내 안 내 누리 안에
무닐 수 없는 장벽이 있도소이다.

아아 애절한 구속의
모래문이여.

넓은 천지간에 속세를 등져
깊이 숙여 쓴 고깔 밑에
고이 접은 네 아미
죄스럼과 부끄러움을 가려
그늘진 푸르른 정의(淨衣)
남몰래 앓는 백합을 어리는
빈 산 칡 달은 하마 휘엿하여이다.

야삼경 호젓한 다락에
들리느니 물소리만 요란한데
사람은 없고 홀로 타는 촛불 옆에
풀어지는 깃 장삼에
장한이 너울져
춤추는 부나비처럼
끝도 없는 단꿈을 나는 좇니노이다.

아아, 고독은 죄스러운
사념의 뱀을 낳는가
내 맘 그윽히 떠오르는 마아야
남몰래 떠오르는 꿈결 같은
마아야의 손길.

천만 겹 두른 산에
어리고 서린 두렁칡이
밋밋한 오리나무를 친친 감아 얽으러져
제멋대로 살어 연다.

사람도 저처럼 어러져, 멋대로 살어 열까
바람도 그리움도 천만 없소이다. 나는……
절로 피인 꽃이니다.
만개한 꽃의 매력으로 부풀어오른 몸뚱어리
오오, 순수한 장미의 덩어리여.
바람으로 솟은 둥실한 도리(桃李)의 메여.

팔상(八相)에 이끌리는 무릇 재앙의 씨여
오오, 끊기 어려운 삼계(三界)의 질긴 연(緣)이여
내가 오히려 사갈나의 꿈숲을
얼 없이 헤매느니
광풍에 지부친 뱃사공처럼
물 아래 세 가닥 모래
깊은 웅뎅이를 보지 못하는다.

‘보리살타’ 오오,
‘보리살타’
나무 여래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지장보살.

중생을 건지신 높은 덕에
청정한 크신 법에
내 몸을 바침이 내 평생의
원이니다.

시방 너른 하늘 아래
시방 너른 하늘 아래
내 몸이 한낱 피여지는 꽃이니다.
첩첩한 구름산에 남몰래 살어지이다.
살어지이다.

그러나 오오 그러나
사바를 꿈꾸는 나여. 마(魔)에 이끌리는 나여.
오오, ‘마라’ 네, ‘마라’
오뇌의 이리여.
바람 속에 달리는 들짐승이여.

네가 만약 장송에 깃들인 학 두루미라면
구름 잠긴 영(嶺)에 흰 날이 흐르는 제
구천 높이 솟아 훨훨 날아도
여지 않았으랴
내가 적막한 기와 우리 속에
차디찬 금빛 소상 앞에
엎더져 몸부림하는 시름의 포로가 되어
감은 치의(緇衣) 속에 솟아오르는 오뇌의 불길이
꽃바리에 타는 향연 같도소이다.

오경 밤 기운 절에 헤매는
바람결에 그윽히 우는 풍경 소리
상방 닫힌 들창에 꽃가지
흔들려 춤을 추고
창 밖 구름 뜰에 학도 졸아
밤이 더욱 깊으메라.

쓸쓸한 빈 방안에 홀로 일어 앉아
남몰래 가사 장삼을 벗도소이다.
벗어서 버린 가사 장삼이
방바닥에 흐트러져
푸른 못 속에 뜬 연꽃 같으니다.

누우면 잠이 오며
앉으면 이 시름이 사라지랴
이제 누운들 어느 잠이 하마 오리
어지런 시름 숲에 누워 앉아
홀로 밤을 새우나니
서역 먼 길은 꿈 속에도 차노메라.

겁겁(劫劫)에 싸인 골은 안개조차 어두메라.
극락이 어디메뇨 가는 길도 모르메라.

오오, 스님. 바라문(門)의 높으신 몸이여.
금석같이 밝으신 맘이여.
하해같이 넓으신 품이여.
백합같이 유하신 팔이여.

날 어려지이다 어려지이다
이 밤 어려 자는 목숨이 하마 절실하여이다
가뭇없는 속세의 티끌로 나는 가느이다
‘사바세계’ ‘일체고액’을 넋에 지고
여느이다.

스님 오오, 모진 이 창생을 안아지이다.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바라를 치며 춤을 출까나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헐은 가슴에 축 늘어진 장삼에
공천풍월(空泉風月)을 안아 누워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지루한 한평생을 짧게 살어여지이다.
수유에 지는 꿈이 소중하여이다.

다디 단 잊음이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 육신의 발원이여
게으름에 길길이 풀어지는 보석 다래여
천길 구름샘에 폭포가 쏟아져 내리노이다.

아아, 나는 미쳤는가
나는 짐승이 되었는가
마라의 짐승이 되었는가.
속세에 내린 탐란한
암사슴이 되었는가.

제가 제 몸을 얽는
관능의 오랏줄이여.
아스리 나는 미쳤어라.
유혹을 버리리라.

나는 거룩한 얼을 잃었어라.
형산(荊山) 묻힌 백옥같이 청정한
예지의 과일을 나는 잃었어라.

환락은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느니,
오오, 미친 상념이여, 허망한
감각이여.

물결이 왔다 철렁 달아난
빈 모래펄이여.
흐트러진 젖가슴에 회한의
바람이 휘돌아 불어
내 안이 텅 빈 동굴 같으니다.

꽃 지는 산 다락에 울어예는
귀촉도
영정한 저 소리만
어지러운 물소리에 적녁히 굴러
잠자지 못하는 사람의
깊은 속을 울리노라.

열치매 부엿한 둥근 달이
꽃구름에 어려
둥실 날은 추녀 위에
나직히도 걸렸어라
깊고 높고 푸른 산이 날 에워
네 골은 비어 죽은 듯 고요하여이다.

접동새. 우는 저 두견아.
어느 구름 속에 네가 울어
짧은 밤을 새우는다.
두견아. 네가 어이 남의 애를
끊느니.

쿵쿵 흐르는 물소리도
네 울음에 겨워 목이 메이노라.
물가에 내려 이슷한 수풀 속에
내 벗은 꽃 같은 몸을 씻노이다.

공산 잠긴 칡 달이 물 위에 떠
금빛으로 흐르메라
휘미진 여울에 빠져 흔들리는
내 고운 모습
여울에 잠근 하얀 진주 다래여.

물거울에 흐트러졌다 다시
형체를 짓는 보석의 더미여.
네가 물같이 흐르지 못하여
빠진 달처럼 구름 샘에 머무느니.

모양에 갇힌 포말의 뫼여.
내가 이 맑은 경(境)에 와
죄업의 티끌을 씻노라

적막은 푸른 너울처럼 감돌고
부풋한 아리따운 형태의 반영에
고혹하는 비밀의 힘은 살아나노나.

아아, 몸과 영혼은 영원히
배반하는 모순의 짝이런가
씻어도 씻어도 흐려지는 관념 형태여.

물아. 흐르는 물아. 철철 흐르는
물아.
풀어진 네 몸은 행복도 하여라
응고되지 않는 네 형체

번뇌도 시름도 없으리.
천 가닥 흩어지는 구슬 골짜기
네가 풀어져 흘러 산 밖으로 여는다

언제나 새로운 근원
흐려지지 않는 순수한 샘이여.

뎅!……
새벽 종이 우노라
밤이 이내 지새련다
뎅! 뎅! 종이 우노라
종소리 굴러 물소리에 흔드노메라

소쇄한 유리 속에 넌즛 선 나
고독한 나여.
여명은 참으로 모든 형체를 드러내고
물체와 영상을 나뉘노라

보랏빛 수풀 위에 흐려지는 달 그리메
창천이 부엿이 밝아
낙락한 푸른 봉우리가 이곳 가까이 다가서노나.

청산아 네 거룩도 하여라.
구름에 솟은 바위도 자라나는 나무도
어둠에서 되살아나
불멸의 빛을 던지노라.

네가 날 위해 날 위해
언제나 있어 주렴
그러나 부세(浮世)를 그리는 나
내 몸에 소용돌이치는 숙명의
부르짖음이여.

아아(峨峨)히 솟은 푸른 봉에 밝아 오는
숲 바다
밀밀한 나무가 금빛 나우리를 흔들고
지금 아침 태양은 장미꽃으로 벌어지노라.
가지 끝에 자던 새들 잠 깨어
생생히 우지진다.

둥, 둥, 북이 우노라.
두리둥둥, 아침 법고가 우노라.
천수 다라니 염불 소리
가사 장삼에 염주를 목에 걸고
아침 재를 올리느이다

아아. 우상에 절하는 어리석은 무리
서글픈 위선자여. 거지의 청신녀(淸信女)여.
꿈도 시름도 비명으로 사라지리
시간은 혼미에서 깨어나느니
아침 빛깔이 화려하게 불타
자잘한 삶의 소리 일어나노라.

북 소리 염불 소리
염불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바라 소리
바라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흘러
종소리도 흔드노메라.

일만봉 구름 속에 울어예는 산울림
미풍은 참으로 내 젖가슴을 틔우고
첩첩한 산허리에 장미의 숲을
건느노라.

네, 늘어진 장삼에 소매를 떨쳐
그윽한 저 절을 내린다
무위한 슬픈 계곡을 나는 내린다···.

<석초시집>(을유문화사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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