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교회 뭇별예배 8·11] “제사보다 ‘자비’를···타락한 종교는 ‘죄비즈니스’”
베이직교회는 지난 4월부터 매월 4~5번의 일요일 중 한차례만 서울 논현동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주일은 각자 형편에 맞게 지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베이직교회는 이를 ‘뭇별예배’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입니다.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는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한 주일 맞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아시아엔>은 조정민 목사의 뭇별예배 설교문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조정민 목사] 이 세상에 가장 슬픈 일은 무엇인가를 사람이 만들어놓고 사람이 만든 그것에 사람이 묶이는 것입니다. 돈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돈에 묶이는지 모릅니다.
핸드폰도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요즘 그 핸드폰에 묶여 삽니다. 게임은 어떻습니까? 그 게임이 격투기이건 모바일 게임이건 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정한 게임의 규칙입니다. 그런데 그 게임이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을 놓고 우리는 본말이 전도되었다, 앞뒤가 바뀌었다, 본질과 형식이 뒤바뀌었다, 이런 표현들을 씁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이 우리 삶의 앞뒤를 바꾸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것과는 비할 수 없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상과 이념, 그리고 종교들입니다.
이들은 다 인간이 생각으로 만든 생각의 틀입니다. 또한 생각의 틀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서로 다른 관점들입니다. 하지만 이념이나 종교는 사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생각이나 관점 하나가 우리의 삶 전체를 황폐하게 할 수도 있고, 인류의 미래를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그런 해악을 끼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오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소수의 종교인들이 자기네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을 견디다 못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을 인간의 상대적인 구원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실 수 없어서 오셨습니다. 신앙의 형식이 신앙의 본질을 삼켜버리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하실 수 없어서 오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심술궂은 도덕선생쯤으로 만든 종교인들의 가면과 위선을 벗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그 상징적인 사건 하나를 봅니다.
마태복음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시간과 장소를 봅시다. 때는 안식일이고 장소는 밀밭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걸어가는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의 동정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의도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가다오다 만난 것이 아니라 감시의 눈길이 번뜩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른 아침에 간음하는 여인을 붙들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자들과 비슷한 분위기 아닙니까? “보시오. 당신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지금 하고 있소.”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질책하는 어조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면서 배가 고픈 나머지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우선 누가 보기에도 안됐습니다. 지금 먹을 양식이 없는 형편입니다. 물론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후원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전도를 위해 움직이다 보면 돈이 떨어질 수도 있고 또 너무 바쁜 나머지 식사를 거를 때도 있었습니다. 허기진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낱알을 생으로 먹습니다. 자기 밭 작물이 아니지만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이 굶주리는 이웃들을 배려하도록 하셨습니다.
신명기 23: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포도원을 지날 때 배고프면 포도를 배부르게 먹으라고 하십니다. 곡식밭을 지날 때 배고프면 이삭을 따먹으라고 하십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다만 포도를 그릇에 담아가지 말고 곡식을 낫으로 추수하듯 잘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허기를 면하도록 배려하지만 욕심을 채우도록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오늘이 안식일이고 안식일에 이삭을 따는 것은 안식일 규정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 손을 고치는 것을 보고도 시비를 걸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따지자 율법을 들어 말씀해주십니다.
마가복음 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이 두 가지 사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유대인이라면 그 이름만 들어도 껌뻑 죽는 다윗 얘깁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도망갈 때입니다. 너무나 배가 고플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납니다. 먹을 걸 좀 달라고 하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성전의 진설병을 줍니다.
진설병은 보통 금요일 떡을 만들어서 안식일에 성소 떡 상에 열두 덩이를 올립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면 제사장들만 그 떡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다윗이 그 떡을 먹기 위해 들어가서 안될 성소에까지 들어갑니다. 먹어서는 안될 떡을 먹었고 들어가서 안될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는 질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안식일 규정이 제사장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모든 규정이 제사장들에게 해당되지 않을 뿐더러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한다고 하더라고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누군가의 안식을 위해 나의 안식을 포기하는 것은 안식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본질을 살리는 일이라는 얘깁니다. 사실 안식은 창조와 불가분입니다. 창조는 안식으로 마무리되고 안식은 또 다른 창조의 시작입니다. 안식은 창조 리듬의 일부분입니다.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20: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은 창조 질서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굳이 다른 날 하셔도 될 일을 안식일에 하십니다. 불치병 환자들은 평생 그 병을 앓던 사람들입니다.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치료를 늦춘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이 보는 가운데 그들을 치유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불치병 난치병 환자들의 병이 낫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느냐 지키느냐입니다. 아픈 사람이 회복되는 것보다 더 큰 안식, 더 온전한 안식이 없다는 사실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죄의 속성입니다. 죄란 하나님보다 나 자신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 버릇입니다. 죄는 결국 뒤집힌 것입니다.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합니다. 사람보다 사람이 만든 우상을 더 사랑합니다. 사람보다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를 더 사랑합니다. 신앙의 본질보다 신앙의 형식에 더 매달립니다. 예배 드려야 할 예배의 대상보다 내가 예배 드리는 형식이 더 중요합니다. 성전의 주인보다 성전과 기물이 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내가 성전보다 더 크다. 내가 성전 주인이다. 너희들이 성전이라고 부르는 내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 너희들 하는 짓을 내가 그냥 지켜볼 수가 없어서 이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남겨두지 않고 철저히 무너뜨릴 것이다. 아마 성전보다 내가 크다는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소스라치듯 놀랐을 것입니다. 성전을 신앙의 본질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이처럼 빗나간 태도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왜 솔로몬 성전이 다 무너졌습니까? 왜 성전 기물을 바벨론에 다 빼앗겼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다 끌려가게 하셨습니까? 성전보다 큰 이를 모독하고 성전에 넋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성전의 법궤를 찾고 있습니다. 이 법궤는 또 어떻게 해서 사라졌을까요? 처음에는 이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 법궤를 마법의 도구나 부적처럼 쓰려고 전장에 가지고 나갔다가 그만 빼앗기고 맙니다. 블레셋에 재앙이 계속 일어나자 이 법궤 탓이라는 생각이 들자 블레셋 사람들이 아무 조건 없이 법궤를 돌려줍니다. 이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지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탈취당할 때 법궤는 사라지고 맙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말씀대로 사는 데 관심이 없는 백성들에게 말씀 상자인 법궤가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본말이 전도된 신앙, 율법을 전해야 할 책임을 진 자들이 본질과 형식을 뒤바꿔놓은 신앙을 가장 매섭게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외에 저주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종교전문가들이 눈을 치켜 뜨고 율법대로 살지 않고 율법을 무시한다고 고발한 사람들이 누구건 그 사람들 모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안식일 규정을 앞장서서 무시하셨습니다. 안식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안식일의 복잡한 규정으로 전통을 삼은 것을 무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드디어 종교와 신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주십니다. 호세아 말씀을 들어 신앙의 본질을 밝혀주십니다. 먼저 호세아 말씀을 확인하십시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본질은 인애, 자비, 우리가 자주 듣는 헤세드에 있는 것이지 제사나 제물에 있지 않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의 본질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데 있지 성도들이 드리는 형식으로서의 예배나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과 헌물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배 형식과 헌금과 헌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 즉 신앙의 핵심가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지 화려한 예배당이나 장엄한 예배 의식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란 희생제물 전부를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내 삶을 전부 드리고 내 생명을 모두 드리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잘 알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까? 혹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거나 오해하면서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잘 몰라서 열심을 내지 않는 편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열심을 내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위해서는 실제 어느 쪽이 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호세아에 기록된 이 말씀을 일러주시면서 너희들이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규정을 들어 죄인을 만들어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죄 없는 사람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본질과도 맞지 않는 규정들을 만들어서 죄인을 양산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교는 죄 비즈니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타락한 종교는 죄 비즈니스입니다.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만들어 죄값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점을 드러내십니다.
마태복음 15: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의 계명은 자비가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울타리입니다. 그러면 제사는 무엇입니까? 그 울타리를 잠시 벗어난 사람들이 다시 그 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용서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울타리에 감시 카메라를 달아놓고 나간 사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감시하는 자들끼리 모여 나머지 사람들을 피감시자 그룹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또한 제 멋대로 별도 울타리를 만들어 감옥 같은 캠프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한마디로 정의해주십니다. 너희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구나. 너희들의 종교가 하나님의 신앙을 대적하고 있구나. 바울이 이걸 깨달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울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지금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다한다고 스스로 굳게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보다 제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끝없이 요구합니다. 이런저런 예배를 빌미로 성도들을 불러모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과연 하나님을 위한 것 맞습니까?
고린도전서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은 사랑 없는 종교행위에 진저리를 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오직 한가지가 바뀌었습니다. 제사보다 자비가 먼저라는 말씀을 확인한 것입니다. 나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이고 나의 헌신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이고 나의 기도보다 성령님의 임재가 먼저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능동태 신앙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본질적으로 수동태입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하기 전에 사랑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심령을 채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비에 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흠뻑 젖는 것이야말로 구원받은 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흔히 우리가 성령의 단비라고 표현하는 것이 다름 아닌 자비의 빗줄기입니다. 굵은 빗줄기 아래에는 잠시만 서 있어도 온 몸이 흠뻑 젖습니다. 또 폭포수 물줄기 아래에 서 있어본 사람은 그 자리에 서 있기가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 폭포수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비가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비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뻑 젖은 사람이 메마른 땅을 종일 걷다가 지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을 자비의 폭포수 아래로 데려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이 폭포수가 너무 시원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내일도 모레도 맞으러 오겠습니다. 일생 오겠습니다.” 이런 서원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기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도 그 자비를 맛보지 못한 사람을 그 폭포수 아래로 데려와 직접 맞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맞겠다고 폭포수 근처에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오는 것입니다. 뭇별 예배가 그 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제가 예배 드리는 것보다 이 자비를 이웃이 알게 하는 데 더 마음을 쏟게 하소서.
<나눔과 토의, 그리고 묵상을 위한 질문>
Q1 내가 하나님의 자비보다 제사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Q2 우리가 예배 드리기에 앞서 먼저 화해를 청하거나 실천한 일이 있습니까?
Q3 우리는 어떨 때 우리의 신앙심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까?
로마서 10:10 (KRV)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도행전 19:2 (KRV)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요한복음 10:11 (KRV)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17 (KRV)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한일서 3:16 (KRV)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로마서 16:4 (KRV)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KRV)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로마서 8:9 (KRV)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요한복음 8:44 (KRV)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르쳐주신 복음, 진리이신 성령, 희생의 마음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가지세요.
당신께 평안과 행복, 축복과 은혜가 함께하시길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