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교회 뭇별예배 8.18] 조정민 목사, ‘굶어 숨진 탈북민 모자와 착한 사마리아인’

예수와 어린양, 거기엔 넘치는 사랑
베이직교회는 지난 4월부터 매월 4~5번의 일요일 중 한차례만 서울 논현동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주일은 각자 형편에 맞게 지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베이직교회는 이를 ‘뭇별예배’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입니다.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는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한 주일 맞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아시아엔>은 조정민 목사의 뭇별예배 설교문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편집자>

 

누가복음 10:25-37 그처럼 자비를 베풀라

본문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알려진 말씀이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자기 나름대로 철저히 예수님의 신앙을 검증해 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율법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메시아라는 얘기가 들리는데 도대체 시골 랍비가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자신만만하게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의 질문하는 어투는 비록 그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이렇게 들린다. “당신은 나 같은 율법교사와 대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해서 영생을 얻었는지 알기나 하는 거요?”

내가 뭘 해야 앞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하고 간절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당신도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양인데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지 제대로 가르칠 능력이 있기나 한 거요?” 이런 뉘앙스다.

그가 진실로 영생을 얻고자 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주님’이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그냥 좋은 선생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과 영생을 간절히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한밤에 예수님을 은밀하게 찾아온 니고데모는 적어도 이 율법교사보다는 진지하다. 예수님은 그에게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신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와 달리 그 속에 교만이 가득한 이 율법교사에게는 예수님께서 오히려 반문하신다.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너는 율법교사 아니냐? 율법 전문가 아니냐? 율법을 잘 알 것 아니냐? 그래 도대체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그리고 너는 그 율법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그런 반문이다.

마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시기 전에 지금 자신만만한 한 율법교사 이외에 다른 율법교사들도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토라의 핵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율법의 취지가 무엇인지, 왜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셨는지, 그리고 율법을 배워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몰라서가 아니라 아는데 아는 대로 안 사는 것이문제다. 예수님의 반문에 이 율법교사가 너무나도 의기양양하게 대답하자 예수님은 실소하셨을 것이다. “알면서 왜 찾아왔니? 정답 알면서 나한테 왜 물어보니?”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답을 아네, 맞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본질이고 율법의 핵심이고 율법의 전부 맞아. 그 답을 네가 알고 있으니 그렇게 살아라. 그렇게 말씀대로 살면 그러면 영생을 사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성경 왜 읽니? 성경공부 왜 하니? 성경 암송, 성경 필사, 왜 하니? 그대로 안 살려면 그것 다 왜 하는데? 교회 왜 다니니? 교회 왜 헌금하고 헌신하니? 왜 전도하고 왜 선교하니? 그게 진실된 사랑에서 시작된 일이 아니라면 그것 다 왜 하는 거니?”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 한번 철저히 다뤄보겠다고 질문 한마디 했다가 허를 찔렸다.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했다는 말은 의롭고 성스러운 얼굴 표정을 지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미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말씀대로 다 지키며 살고 있어요. 나는 하나님 목숨 다해 사랑하고 내 이웃 다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어떤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거요?”

그러나 잔뜩 거룩한 표정을 짓느라고 이처럼 직설적으로 물을 수도 없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웃을 반의 반이라도 알기나 합니까? 내게는 얼마나 많은 이웃이 있는지 당신 같은 사람이 짐작이나 하겠소?”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내 이웃이 누구누구인지 당신이 알기나 하겠느냐는 마음으로 가볍게 물었던 질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갑자기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 얘기를 하신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실제 강도가 자주 출몰했고 이런 사건이 빈발했다. 예루살렘은 해발 870미터에 있고 여리고의 고도는 해저 250미터다. 급경사를 이루는 길이고 외진 곳이 많았기에 이런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제사장이 흘깃 보고는 아주 멀리 돌아서 외면하고 지나가버린다. 만약 이 사람이 죽은 사람이면 사체에 접촉한 것이어서 정결례를 행해야 하고 문제가 복잡하다. 그냥 안 본 것으로 하면 간단하다. 한 레위인도 그렇게 지나갔다. 레위인은 성전의 여러 가지 일에 헌신한다. 성전 안에서는 열심이었겠지만 여기는 성전 밖이다. 그도 제사장과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성전 일이라면 성가셔도 해야 하고 정성스럽게 하는 몸짓이 필요하지만 길 가다가 맞닥뜨린 피투성이 행인에게 그럴 것까지는 없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간다. 비즈니스맨으로 사업차 지나가는 길인데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유대인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포도주로 상처를 씻어주고 기름을 바른 뒤 나귀에 싣고 가까운 여관으로 간다.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 당시 방값으로 치면 대략 보름치가 넘는 돈이다. 넉넉히 돈을 쥐어주고 잘 돌봐주도록 부탁한다. 돈이 더 들면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더 지불하겠다고 약속한다.

예수님께서 이 얘기를 들려주고 물으신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율법교사는 평생 내 이웃을 두리번거리며 살아왔다. 내가 덕 좀 볼 이웃은 누군가? 절대로 내게 손해 끼치지 않을 이웃은 누군가? 만나면 늘 기분 좋은 이웃은 누군가? 늘 깔끔하고 모든 일에 실수가 없는 이웃은 누군가? 그런 이웃 찾아서 그런 이웃 사랑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불쑥 리듬을 깨뜨리고 나타난 사람, 만나고 싶지 않고 만나면 부담이 되는 사람, 그러나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 강도 만난 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는가를 물으신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이웃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이웃으로 국한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가 그토록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마리아인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너희들이 개라고 부르는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도움이 절실하다면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이웃의 한계를 깨뜨리고 이웃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킨 것이다. 누가복음 6장 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웃이 있다. 이웃 없이 살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웃을 이웃으로 대하나? 나를 사랑하는 자, 내게 예절을 갖추고 호의를 보이며 나를 선대하는 자, 내게 되돌려줄 것이 분명할 뿐더러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되갚을 수 있는 자, 그런 사람들을 이웃 삼고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서도 좋은 이웃 찾아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가고 좋은 결혼 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생각을 갈아엎으라고 하신다. “너는 제발 네 이웃 그만 찾고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렇듯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갈아엎으신다. 관점을 뒤집어 놓으신다. 생각의 틀 자체를 바꿔놓으신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되묻자 그는 입 안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한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 율법교사는 끝내 사마리아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라는 말은 금기어나 같았다. 입에 담는 것 자체를 불결하게 여겼다.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임을 알았으니 이제 너도 가서 이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해라.”

여기서 다시 정리해보자. 이 얘기의 시작은 영생이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누리나?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면 영생을 누린다. 나한테 득이 되는 사람 이웃 삼아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의 이웃되어 줄 때 영생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기승전결이다. 영생과 자비의 관계가 드러난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는데 영생 얻고 나면 어떻게 살게 되나? 나한테 필요한 사람들 내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이웃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가 비난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저 사람들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저들과는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저 불신자들은 우리와 격이 맞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 다 지옥 갈 사람들입니다’ 하면서 이웃들과 다 등돌린 것 아닌가? 강도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칼에 찔려 죽게 생겼는데 우리도 멀리 피해버리고 그냥 지나오지 않았는가?

주일 아침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든지 내 입장을 변명할 수 있다. “주님, 설교는 성도들과의 약속입니다. 주일 강단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냥 119 신고 정도 해주면 됐지요.” 그런데 실제 이렇게 해서 교회 성도는 늘어나고 교회 건물은 커졌는데 세상은 교회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강도 만난 자들이 결국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행히 목숨을 건져도 또 다른 강도에게 고통 당하는 2차 3차 피해가 잇따른다는 사실이다.

엊그제 목숨을 잃은 탈북민 모자 소식이 전해졌다. 십년 전에 굶주림을 피해 북한에서 빠져 나온 가족이 한국 서울에서 아사 상태로 발견됐다. 사망한지 두 달이 지났고 집에는 쌀 한톨이 없었다. 엄마와 함께 숨진 아들은 여섯 살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어느 누구도 이 모자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다. 교회가 6만개가 넘는 한국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나? 나를 비롯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내 좋은 이웃과만 어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탓이다.

물론 정부의 책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제 힘으로 일어설 수도 없고 혼자 힘으로는 살 길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도우라고 국민들이 세금 내고 정부가 재정지출 하는 것 맞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떤 사람을 말하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조건 없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나? 내가 강도 만나 피 흘리고 죽어갈 때 자비로 나를 구해주신 손길에 감동해서 나도 강도 만나 피 흘리는 누군가에게 자비의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성숙할까? 우리의 영생은 어떤 삶으로 드러날까?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영생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신다.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사람을 이웃으로 섬긴 것을 나를 섬긴 것이라고 가르쳐주신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지극히 작은 선을 베풀었을 뿐인데 그 자비로운 행동 하나가 예수님을 섬긴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이 일상의 자비로운 행동들로 완성된다고 선언하신다.

기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작은 손길과 발길로 날마다 전해지게 하소서.

<나눔과 토의, 그리고 묵상을 위한 질문>
Q1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누구를 통해 어떻게 깨닫게 되었나?
Q2 내가 일생 이웃 삼고자 했던 사람과 내가 이웃이 되어주고자 한 사람은 누구인가?
Q3 지금 우리 주위에 우리가 이웃되어야 할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들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