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묘비명은 준비돼 있습니까?···JP 김종필 ‘사무사'(思無邪)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나는 이제 생로병(生老病)은 다 거쳤고 사(死)만 남은 사람이다.”
운정(雲庭)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한 말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준비된 죽음’을 거쳐 지난 6월23일 오전 8시 15분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92세를 일기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정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게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 조문은 하지 않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2017년 대선 때 “문재인이가 돼서는 안 되겠다. 김정은이가 자기 할아버지라도 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민훈장(Order of Civil Merit)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며, 5등급(무궁화장-모란장-동백장-목련장-석류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6월 27일 오전 7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영결식에서 장례위원장인 이한동 전 총리는 조사에서 “총재님은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의 풍요한 대한민국, 배고프지 않고 자유와 민주를 만끽하는 오늘을 있게 한 분이셨다”며 “조국 근대화를 설계하였고 행동으로 심혈을 기울여 이 나라 산업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치셨다”고 추모했다.
김종필 총리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총 121자로 써진 묘비는 2015년 2월 86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박영옥(朴英玉) 여사가 묻혀 있는 충남 부여군 소재 가족묘역에 세웠다.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 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 「年九十而知八十九非」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 「笑而不答」하던 者/ 內助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묘비명에는 논어, 맹자, 전국책(戰國策), 회남자(淮南子) 등 동양의 고전이 두루 등장한다. 이는 그가 고전과 문예에 밝고 유머와 여유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묘비명에는 자신의 정치철학과 아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아내 사랑이 곧 자기 사랑이야”는 雲庭이 자주 한 말이다.
묘비명 전문은 이런 뜻을 담고 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이 곧고 바르므로 邪惡함이 없다)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 경제가 궁핍하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진력 하였거늘, 만년에 세월의 허망함을 한탄하며 쓸데없이 말 많은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笑而不答)”
김종필은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2년을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48년 제8기로 졸업했다. 그는 1961년 5·16군사혁명(정변)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했다. 김종필 총리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 근대화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1960-80년대 산업화의 성공은 도시에 건전한 중산층을 육성하여 정치 민주화의 토대가 되었다. 김종필 총리는 한국 산업화의 역사를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빵을 먹고 자란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총리는 정계 은퇴 이후인 2011년에는 “사업은 실업(實業)이지만,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했다. 즉,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JP는 관용과 타협의 정치를 꿈꾸며 내각제(內閣制)를 평생 목표로 추진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른바 ‘3김’의 김대중(金大中, DJ, 1924년 1월 6일 전남 신안 출생) 전 대통령이 2009년에, 김영삼(金泳三, YS,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 출생) 전 대통령이 2015년에 타계한 후 김종필(JP,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 출생) 전 국무총리가 별세하여 ‘三金 政治’는 물리적으로 그 수명을 다하고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