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스님의 선시조⑤]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지난 5월 26일 오후 열반하신 조오현 큰스님의 열반송입니다. 평생을 구도자로서, 시조시인으로서,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따뜻한 이웃으로 생을 살아온 오현 큰스님. ‘아득한 성자’ ‘인천만 낙조’ ‘침목’ 등 숱한 애송시를 남긴 그의 문학적 성취를 배우식 시인의 연구를 통해 돌아봅니다. <편집자>

[아시아엔=배우식 시인] 선시의 탄생과정과 내용을 알면 선시의 정의를 도출할 수 있다. “선과 시의 첫 만남은 먼저 선가(禪家)에서 시의 형식을 빌어 ‘선(禪)’을 나타내면서 이루어진 데서 시작된다. 이른바 신수와 혜능이 시적 형식으로 선의 묘의(妙意)를 밝힌 사례가 그것이다.”

이런 선시의 탄생은 오조 홍인이 대중에게 깨달음의 노래인 게송(偈頌)을 지어 제출하라는 요청에서 출발한다. 오조 홍인의 이런 요청에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이 각각 게송을 지었으며, 이 게송이 중국 선종사상 최초의 선시가 된다. 이때 지은 게송으로 혜능은 깊은 밤 오조 홍인의 법을 받는다.

박학다문한 대선배인 신수를 물리치고 일자무식인 초동목수(樵童牧竪: 혜능)에게 법을 전하였으니, 불법은 문자에 있지 않고 견성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후에 혜능이 4구게(불립문자·직지인심·교외별전·견성성불)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선시는 중국 선가에서 ‘선’ 혹은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표현도구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신수와 혜능의 게송은 선과 시를 하나로 융합하여 중국의 시학(詩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처럼 시와 선의 융합으로 시를 알지 못하면 선을 알 수 없고, 선을 이해하지 못하면 참선인의 깊은 경지가 담긴 시를 이해할 수 없으며, 또 선으로써 시를 논한 심오한 뜻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시선일치(詩禪一致), 시선일여(詩禪一如) 등의 언어가 출현한다.

우리나라의 선시의 형성은 고려 중엽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무의자 혜심(慧諶)이 본격적으로 선시를 처음으로 지음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선시가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선시는 신수와 혜능의 게송으로서 자신들의 언어로 쓴 ‘한시(漢詩)’였으며, 혜심 역시 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시에는 우리의 한글이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는 한글로 선시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교단의 형식은 5언 4구의 한시 형식을 불문율처럼 지켜오며 그대로 쓰고 있다. 이처럼 선가(禪家)에서는 지금도 관행처럼 ‘한시’ 형식을 빌려 쓰고 있다. 이를 불가 혹은 선가의 ‘전통적 선시’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만해로부터 시작된 ‘한글 선시’도 선시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렇듯 선시는 ‘한글 선시’를 포함한 한시 형식의 전통적 선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선시와 선시조의 변별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한시 형식의 선시를 새로운 형식인 한글 ‘선시조’로 창작한 조오현은 첫 선시조집인 <심우도>를 통해서 최초로 선시조를 선보인다. 새로운 형태의 조오현 ‘선시조’는 선과 시조의 결합으로 형성된다. 우선 ‘선시조’는 ‘신수와 혜능의 게송’으로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한시 형식의 선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아직은 사전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한글 선시’와도 정형의 형식과 의미구조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글 선시는 자유시에 근거하고 있으며, 선시조는 시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한글 선시와 선시조의 변별성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자유시와 시조의 형식과 의미구조를 파악함으로써 그 변별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논증적 근거로 우선, 형식적인 면을 보자.

시조의 형식장치는 ①초·중·종장의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②각 장은 걸리는 시간이 비슷한(시간적 등장성을 지닌) 음보(음의 걸음걸이) 넷이 모여 이루어지며 ③종장의 첫 걸음은 긴장과 조임의 석 자, 둘째 걸음은 이완과 풀림의 다섯 자 이상으로 될 것 등의 세 가지 조건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시는 시조와 같은 정형성이 없으므로 형식적인 면에서는 ‘한글 선시’와 ‘선시조’의 변별성은 당연하며, 이에 대한 어떠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자유시와 시조가 내용적인 의미구조에서도 변별성을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논증의 문제를 의심한다. 그러나 시조와 자유시의 내적 의미구조에서도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시조가 3장의 짧은 내용 속에 현대시 1편의 의미구조를 담아낼 수 있는 내적 틀을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장 3행의 시조 한 수가 현대시 한 편의 의미를 모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시조의 3장은 현대시의 3행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것이며, 한 행을 이루는 2구의 성격도 현대시에서의 한 행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각 수마다 개별 작품의 의미구조를 수렴하면서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이루어지는 연시조 역시 ‘자유시’와는 명확하게 그 변별성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내용적인 의미구조에서도 ‘자유시’ 혹은 ‘현대시’와 ‘시조’는 확실하게 변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한글 선시’와 조오현의 ‘선시조’ 역시 논리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오현 선시조는 이처럼 형식과 의미구조면에서 ‘한글 선시’와는 확연하게 변별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오현 선시조는 한시 형식의 전통적 선시와 한글 선시를 포함한 선시와는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문학 양식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오현 선시조는 위에서 고찰한 선지(禪旨)가 뜻하는 의미와 선(禪)의 정신을 모두 담아 시적으로 표현한다. 다만 한시 형식의 시와 현대 자유시가 아닌 ‘시조’에 그 선(禪)을 담아내어 선시조화 한다. 작품의 형식적 특성은 시조의 형식을 지키면서도 그 안에서 최대한 형식적 자유로움을 갖는다.

조오현 ‘선시조’는 선과 시조의 결합으로 형성된 새로운 장르의 독립적인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조오현 선시조는 외적인 표현보다는 내적인 의미에 집중한다. 그의 선사상 혹은 불교사상 등은 함축된 언어를 통하여 새로운 시적 승화의 세계로 나타난다. 그의 선시조는 평생을 선수행하며 닦고 비우고 또 비우며 닦아온 마음 혹은 영혼의 울림이며 표현이어서 쉽게 그 속뜻이 보이지는 않는다. 조오현의 선시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인 해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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