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이낙연 총리 7남매 ‘어머니의 추억’
[아시아엔=이상기 발행인] 상당수 책은 매력이 있다. 어머니에 관한 책은 매력이라고 보다 마력을 지니고 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책은 훨씬 울림이 크다.
최근 어머니를 기억하며 쓴 책 한권이 나를 눈물짓게 했다. 길지 않은데다 구어체로 되어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인데도 마지막 장을 쉬 덮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가 자꾸 떠올라서였다.
지난달 27일 늦은 오후 이낙연 총리 모친(陳小姙, 1926년 12월 11일(음)~2018년 3월 26일)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 내게 책 한권이 주어졌다. <어머니의 추억>이란 제목이 붙은 책은 이낙연 총리의 7남매가 모친 팔순을 기념해 쓴 것을 2007년 어버이날 펴낸 것이다. 조문 후 만난 문학진 전 국회의원은 “정말 잘 쓴 책이야. 꼭 읽어봐” 했다.
이튿날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펼쳤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가슴이 울컥 했다. 나보다 생일이 꼭 아홉달 빠른 둘째 아들 하연(법성고교 졸업, 지방공무원 임용 후 독학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이 책 발간때 영광군청 직원)씨의 글을 읽고 눈물을 쏟아야 했다.
고향의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무렵, 어머니는 농사를 짓는 틈틈이 채소 행상을 하셨다. 새벽 4시반이면 어머니는 무, 배추 같은 채소 다발을 광주리에 이고 집을 나서신다. 나는 어머니의 기척을 느끼고는 곧 다시 잠이 든다. 어머니가 한 시간 남짓 신작로를 걸어 5km 떨어진 법성(면소재지)에 도착하시면 6시, 남의 집 문을 두드려가며 채소를 다 파시고 나면 7시 정도가 되었다.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7시쯤에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등굣길 중간쯤에서 빈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마주친다. 나는 습관적으로 어머니를 외면하고 말 한마디 없이 어머니 옆을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런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그 장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시는 것 같다.
“법성 가서 채전 팔고 오다 하연이 얼굴만 보면 온몸의 피로가 싹 풀리더라.” (외면)
초등학교 시절, 머리에 쪽을 진 50대 중반의 나의 어머니는?비오는 날이면 10리길을 잰 걸음으로 우산을 갖고 학교로 오곤 하셨다. 8남매 막내인 내가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릴까 걱정해서였다. 어머니가 교실 창문으로 고개를 디밀면 친구들은 “상기야 할머니 오셨다” 소리쳤다. 나는 그때마다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채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책 곳곳엔 궁벽하기만 하던 시절, 조그만 시골마을의 풍경이 ‘속으로 삼켜진 눈물’로 그려져 있다. 몇 대목을 소개한다.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왕복 10km를 걸어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시다가도 자식들이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모습만 보면 피로가 다 풀리고 힘이 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어머니께 어린 저희들은 “사탕 안 사왔어?” 하며 보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응, 오늘은 꼭 사오려고 했는데 엿 장수 사탕 장수가 다 죽어서 상애 나더라(상여 나가더라). 그래서 장수 없어서 못 사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동생도 그때는 어머니의 그 말을 진짜로 믿었습니다.(큰딸 이연순)
“내가 만든 음식이 내가 먹어봐도 맛이 이상하다. 너희들도 맛없으면 먹지 마라.” 그 말씀을 하시는 순간의 어머니 얼굴은, 제가 본 어머니 얼굴 가운데서 가장 외로운 얼굴이었습니다.(큰아들 이낙연)
“내가 당신을 만나 소박맞은 것도 참고, 시앗 본 것도 참았지만, 자식들을 지조 없는 사람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못 참겄소.” 그렇게 아버지의 여당행을 막으신 겁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셨습니다.(큰아들 이낙연. 부친이 전두환 정권 출범 후 민정당 합류를 권유받자 모친이 이를 만류한 사실을 기억하며 쓴 글)
나는 어머니가 몸 편히 쉬시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자녀를 10명이나 낳으셨는데도 몸조리를 하신다거나 감기몸살로 누워계신 적도 거의 없었다. 오로지 자식들과 남편과 시어머님께 희생만 하고 사셨던 어머니는 ‘작은 거인’이었다.(둘째달 이금순)
“옛말에 아들 셋이면 도둑질하는 사람 흉보지 말고, 딸 셋이면 화냥질하는 사람 흉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네가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구나?”
“어머니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술을 먹게 된 것은 내 나이 40줄에 들어서의 일이다. 이것이 위선적인 태도라 해도 나는 할 수 없다. 부모님은 섬김의 대상이지 설득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셋째아들 이계연)
어느새 그 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등장하셨다. “장남! 취했는가? 가서 자소!” 어머니의 단호한 한마디로 모든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우리 형제들에게 어머니는 감성의 원천이자 理性의 支柱이시다.(셋째딸 이인순)
나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몹시 화를 냈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어머니께서 보셨다. 그 때문인지 어머니의 얼굴에 안면마비가 오고 말았다. 치료를 했지만 지금도 어머니의 왼쪽 눈은 오른쪽 눈보다 조금 작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그러셨다. 오래전 외할머니의 얼굴을 나는 지금의 어머니 얼굴에서 본다. 다만 외할머니의 얼굴은 나를 보고 항상 웃고 계셨지만, 어머니의 왼쪽 눈은 나를 보고 우시는 듯하다.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 죄송합니다.(막내아들 이상진)
7남매가 어머니 생전에 함께 쓴 <어머니의 추억>은 이렇게 맺고 있다.
세상에 남겨둔 자녀들과 후손들, 그리고 어머니를 아는 모든 이들이 여전히 그를 사랑으로 기억하는 축복을 허락하소서.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멘!
감동적인 글 이네요. 이교수님! 안녕하세요? 조만간 뵙고 싶어요. 연락주세요. 010-7267-9878서산 김선희 아줌마 입니다. 꼭 빠른 시일내 문자라도 주시면 고맙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