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선진국 담론’ 과연 이대로 좋은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종태 연구교수 ‘선진국의 탄생’ 펴내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얼마 전 책 한권이 내게 배달됐다. <선진국의 탄생>(돌베개)이었다. ‘한국의 서구 중심 담론과 발전의 계보학’ 부제를 달고 나온 책 표지를 넘기니 “이상기 선배 혜존 김종태 올림”이라고 쓰여있었다.
필자가 1994년 한겨레신문에서 젊은 기자들을 지휘하는 ‘시경캡’을 할 때 수습기자로 입사한 그 김종태였다. 그는 기자생활 10년만인 2004년 한겨레를 퇴사해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사회학 석사), 일리노이대(어배너섐페인) 사회학 박사(2011)를 거쳐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인문한국(HK) 연구교수가 돼 있었다.
10년 가까이 소식을 모르고 있던 김종태 연구교수의 소식도 반가운 터에 책까지 지어 보내주다니···.
김종태 교수는 “사회발전론, 비교역사사회학, 글로벌사회학, 정치사회학 등과 특히 비상식적 사회·권력관계를 정당화하는 담론과 그 해체 및 재구성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는 <Eurocentrism and Development in Korea>(Routledge, 2018) 저서와 논문도 꽤 여러 편 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명국·근대화·발전국·세계화·선진국…. 한국은 ‘선진국’인가, 선진국 다음은 무엇이 오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의 물음은 계속된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 국가 역량의 총동원 체제를 구축한 ‘선진국 담론’은 박정희 시대 이래 한국 사회를 지배한 인식 틀이었다. 한국에서 선진국 담론은 언제,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 ‘발전’ 담론의 정치·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선진국’은 어떻게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절대명제가 됐는가?”
김종태 교수는 근대 이후부터 21세기까지 한국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 서구중심주의·발전주의적 세계관의 계보를 추적하며 이 질문에 답한다.
그는 “6월 지방선거와 개헌을 함께 진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청와대·여당과 야당 간의 논쟁이 치열한 이때, 새로운 헌법에서 권력구조만큼 중요한 의제가 있다면, 단연 헌법이 지향해야 할 국가의 미래상일 것”라고 말한다.
그의 계속되는 분석이다.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이뤄졌던 제6차 개헌부터 시작해 현재 제11차 개헌 논의까지, 그 토대인 한국 사회의 변함없는 목표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를 모범으로 삼은 ‘선진국 진입’이다.
이 책은 수십년째 선진국 문턱 혹은 갈림길에 서 있는 ‘국민소득 3만불 국가’ 한국의 지상목표인 ‘선진국 담론’이 등장한 배경과 이 담론이 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꾸준히 변화해 온 양상을 추적한 최초의 사회학적 성과다. <선진국의 탄생>은 현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체제를 지탱한 핵심적인 목표이자 국가적 기치로 운위된 선진국 진입이, 박정희 정권 시기의 국내외적 환경 속에서 강화된 서구중심주의와 발전 담론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발전 담론을 노골적으로 계승·확장했던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퇴행’을 뒤로 하고,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이번 헌법개정 논의의 핵심이라면, 한국의 오랜 목표였던 선진국의 의미와 그 상(像) 역시 재설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 교수는 “한국의 정체가 크게 변화할 시간을 앞두고 선진국 담론의 계보를 추적하며, 이 과잉된 혹은 비어 있는 개념의 한계와 새로운 가능성을 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 사회에서 지배 담론은 그 사회의 목표와 정체성을 규정하며, 지배 담론의 변화는 그 사회의 세계관도 변화시킨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한국의 국가 정체성과 세계관을 규정하는 대표 담론이 발전 담론으로 변화하면서, ‘발전된 상태’를 국가의 목표이자 청사진으로 추구해 왔다. 한국인들은 발전된 상태를 선진국이라 명명하고, 국가의 발전주의적 열망을 이 개념에 투사해서 국가 변화를 추진해 왔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의 통념과 달리 한국이 처음부터 서구를 기준으로 삼은 발전 담론에 집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선진국의 탄생>은 서론에서 현재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그 사회적 역할을 개괄하면서, 이 두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의 선진국 담론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다.
서론에 이은 이 책은 제1부 ‘문명에서 발전으로: 1880~1950년대’과 제2부 제2부 ‘발전 담론의 부상과 현황: 1960년대~현재’로 이뤄져 있다.
이같은 큰 틀 안에서 그는 1장 ‘한국 서구중심주의의 기원: 1880~1930년’ 2장 ‘근대 문명 담론과 일제의 한국 지배: 일제 강점기’ 3장 ‘문명 담론과 발전 담론의 각축: 1950년대’ 4장 ‘발전 담론과 선진국 담론의 부상: 1960~1970년대’ 5장 ‘선진국 담론의 변화: 1980~1990년대’ 6장 ‘발전주의의 담론 구조와 국가 동원: 근대화, 세계화, 선진화로’로 세분화해 설명한다.
이 책은 이어 ‘발전주의 선진국을 넘어서’(결론)와?‘한국·중국·일본의 발전 담론 비교: 국가 정체성과 상호 인식’(보론)을 통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저자는 결론 ‘발전주의 선진국을 넘어서’를 통해 “이제 한국은 ‘각자가 행복한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심스레 제안한다. 앞으로의 선진국은 사회 구성원들의 지향이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어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개별적으로 존중하는 성숙한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선진국 담론이 발전주의자들,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정치인들의 선전 수단에 가까웠다면 이제 선진국 담론은 한국사회 구성원 각각의 삶이 좀 더 구체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찾는 폭넓은 논의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며 “더 이상 발전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오늘, 다기한 국제 정치·인권·환경·과학·노동·교육·복지의 과제 속에서 ‘발전 없는’ 선진국의 새로운 상상력을 찾아가야 한다”고 결론 짓고 있다.
이 책을 덮기 전에 ‘한국·중국·일본의 발전 담론 비교: 국가 정체성과 상호 인식’이란 제목을 단 ‘보론’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에 대해서 역사·영토 인식 문제와 ‘잃어버린 20년’으로 지칭되는 경제 버블 불황을 들어 서구 선진국과 같은 반열에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 중국에 대해서는 정치·사회적으로 다른 선진국과 같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급격한 경제 성장과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이유로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우월한 국가(대국)로 인식한다.
<선진국의 탄생>이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대목은 바로 아래와 같은 저자 김종태 교수의 진단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 정부의 새로운 상상력이 실제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큰 공감을 얻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시민 저마다가 사람의 존재 가치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면 발전에 대한 이 사회의 상상력은 더 커질 것이며, 그만큼 한국은 각자가 행복한 선진국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