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흔적 찾기⑥] 50년 한많은 생을 마감한 그해 여름

“나의 부친 문순남(1924~1974, 文順南)은 일본제국주의 말기 조선 총독부 동원령에 의거 전장에 끌려가 중국 동북지역 만주 봉천에서 복무했다. 선친은 일본 패망과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쟁포로로 수용돼 옛 소련연방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억류돼 3년 4개월간 강제노동을 하다 풀려났다.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노역에 내몰리며 기약 없는 ‘지옥생활’을 한 것이다.”

대구에서 노동 일을 하는 문용식(59)씨는 16살 때 여읜 아버지 문순남의 흔적을 찾아 20년 넘게 국내외를 헤매고 있다. 그는 “이게 나라냐, 이게 정부인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문용식씨는 지난 1월20일 인문학 공동체 ‘수유너머’ 특강을 통해 “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것은 나라잃은 설움을 후손들은 겪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고 했다. <아시아엔>은 몇 차례에 걸쳐 문용식씨의 잃어버린 아버지 흔적 찾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우측이 문용식씨 부친(고 문순남). 유일하게 남은 사진으로 휴전 후 54년1월~58년1월 1사단에서 복무 중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고 문씨는 말했다. <사진= 문용식 제공>

[아시아엔=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나의 아버지 문순남은 1974년 봄,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전역 후 노동일을 전전하며 살아가다 1959년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전라도 광주가 고향으로 처녀 시절 상경해 김포비행장 미군부대 내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소개로 아버지와 만나 교제하면서 혼인식도 못하고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김포군 양서면 과해리(지금의 서울 강서구 과해동) 농촌마을로 들어가 터전을 잡고 3남1녀를 낳아 키우는 동안 아버지는 줄곧 지주에게 고용돼 농사 일에 종사했다.

65년 박정희 정권에서 5년간 끌어오던 한일청구권 협상은 무상 3억, 유상 2억, 차관 3억 등 도합 8억달러를 일본정부가 제공하는 선에서 타결되었다. 다음해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고 청구권 자금이 들어오면서 산업화가 진행됐다. 이에 전기를 공급하는 송전시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강원도 산간지역을 다니며 송전탑을 건설하는 일을 하며 몇 개월 만에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면 어머니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던 기억이 난다. 수시로 끼니 걱정을 하고 이웃에서 식량을 빌려 살아야만 했던 어머니 입장에서 아버지가 돌아오면 한동안은 그럴 염려가 없었으니 안도의 표정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1971년 김포공항 녹지대 중앙에 건설한 조형물 ‘조국에 드리는 탑’ 공사 현장책임자로 일을 했다. 그 조형물은 재미사업가 김시면이란 분이 “조국에 대한 향수와 번영을 기리는 마음에서” 나라에 건설비를 기부해 착공한 것으로 1년만에 완공됐다.

당시에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이 110원 정도였는데, 아버지가 하루 일하며 받는 일당은 1000원이나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족들의 삶은 한결 나아졌고 그 시절에 처음으로 행복이란 것을 느꼈던것 같다.

아버지는 평소 기침을 많이 하셨다. 작고 1년 전부터 체중이 줄면서 몸이 말라가는 것을 느꼈지만 형편상 병원에 가거나 입원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병명도 몰랐다.

그 얼마 후 아버지는 몸져 누웠다. 죽음을 예상하셨던 것일까? 별세 수일 전 한달 넘게 누워만 있던 자리에서 오후에 아버지가 사라지셨다. 가족들은 저녁 무렵에 아버지가 늘 누워 계셨던 자리에서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나와 남동생은 흩어져 마을 곳곳을 다니며 행방을 물었지만 마을 사람들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저녁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60, 70년대초 방 한칸에 부엌 한칸, 마당이 붙어 있는 조그만 초가집에서 살았다. 마을 주변엔 드넓은 김포평야가 있었고 주민의 대부분은 장씨 성을 가진 분들이 오래전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마을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 서울시 영등포구 과해동이란 곳인데 말이 서울이지 서울에서도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아래 윗 마을 사이로 일제 통치시기에 건설된 폭이 50m 나 되는 수로가 지나가고 다리 인근 뚝방 밑에 집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다음 학년 책값을 내라는 독촉 통지문이 도착했지만 책값을 낼 형편이 안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 속에서 집 건너편 수로의 뚝방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남은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지평선에서 해가 사라지고 인적 없는 뚝방길은 사방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넓고도 긴 수로의 물결을 보면서 불안한 마음은 점점 더 깊어갔다.

나에겐 저 세상으로 먼저 간 둘째 남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다섯 살 때 근처 농수로에서 물고기를 잡는다고 나가 물에 빠져 익사했다. 그날 아들의 주검을 지게에 지고 어두운 밤 뚝방길을 따라 공동묘지를 향해 멀어져 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다시 돌아갈까 망설이며 몇번이고 집 방향을 뒤돌아 보면서 걸어가는데 달빛에 뚝방 밑 도랑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었다. 한편으론 저 밑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누군가가 뚝 위로 힘들게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도랑에서 몸을 씻었는지 손에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나는 너무 기뻐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고 비틀비틀 걸으셨다. 나는 어떻게 저런 몸 상태로 여기까지 오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 길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상가에 먼거리에 있던 송정리파출소에서 경찰이 다녀가며 이것저것 묻고 돌아갔다. 사고사도 아닌 병으로 사망한 상가에 경찰이 다녀가는 것은 처음 보았던 일이다.

내가 어른이 되어 이유를 알게 되었다. 1949년 3월26일부터 인천 송월동수용소에서 조사받았던 억류자들은 고향으로 떠나면서 개인신상이 연고지별 관할 경찰서로 인계되었다. 그때부터 정부기관의 요시찰 인물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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