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30만 남경학살···삼일절에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에 들어왔을 때 변발을 거부하는 자는 목을 쳤다. 양주에서만 80만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의 ‘남경학살’이 30만을 헤아리는 도살(屠殺)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도살은 낯선 것이 아닌 모양이다.

곧 인도 인구가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은 중일전쟁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39년 태평양전쟁을 합하여 부른다. 이 기간에 중국 국민이 당한 피해는 20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소련도 거의 같다. 1차대전에서 러시아 군은 황제 니콜라스 2세가 직접 총사령관을 맡았는데 우유부단하여 통수권자로서 장군들로부터도 신뢰를 못 받았다. 후반에야 브루실로프가 공세를 폈는데 그는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160개 독일군 사단을 묶어 놓았다. 이것으로 그는 ‘러시아의 힌덴부르크’로 평가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서부전역은 영국군과 미군이 주가 되었다. 몽고메리가 소련군을 방문하여 서부전역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소련군 지휘부는 모두 웃었다. 몽고메리의 21집단군은 미군 1, 3군과, 영국군 2군, 캐나다군 1군 등 4개 군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소련군은 주코프, 코네프, 로코소프스키 등의 3개 집단군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동부와 서부는 대체적으로 3대1의 차이를 보인다. 사단 숫자로 들어가면 차이가 더욱 크다.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의 압도적 전력에 서유럽은 공황상태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은 총 12개 사단 중 7개 사단을 파병하였는데 중공군이 참전하자 미군이 더 이상 한국에 매어있다가는 위험하다고 느낀 영국이 확전을 반대한다. 1949년 NATO가 설립되고 1955년 독일연방군이 창설되어 비로소 유럽의 안보는 안정되었고, 냉전 기간 중 내내 그 구조로 갔다.

우리는 6·25전쟁 때는 사단 단위로 싸웠다. 춘천전투의 6사단, 다부동전투의 1사단, 백마고지전투의 9사단 등이다. 지금은 사단 단위가 아니라 군단 단위다. 북한은 1군단에서 8군단에 더하여 특수 8군단이 있다. 인구에서 우리의 절반 수준인 북한이 정규군만도 120만이 넘어 우리의 2배다. 해군의 주요 공격 전력인 잠수함은 70척이 넘어 10여척 수준의 우리와 큰 차이가 난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핵이나 북의 화학·생물 무기에 대한 대책도 시급하다.

전쟁 승패의 관건은 통수권자다. 니콜라이 2세의 황후가 요승 라스푸틴의 영향을 받고 독일과 은밀히 거래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수백만 러시아군은 참혹하게 죽어갔다. 최태민과 최순실의 장막 아래 있었던 박근혜와 같다.

재조再祚의 공은 명明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다. 충무공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당시에 이미 일본 땅이 되고, 중국도 산동성 이북 정도는 일본이 먹었을 것이다. 풍신수길의 일본은 청보다 훨씬 강력한 군대였다. 1592년 왜군이 부산에 상륙할 때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군은 15만이었다.

그로부터 50년 후 청이 산해관을 넘을 때 막강하다는 8기는 7500명씩 8개 부대, 즉 6만에 불과했다.

삼일절에 충무공을 다시 생각해 봤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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