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최고미술품 ‘절규’, 뭉크의 우울증이 낳았다?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국내에 ‘절규’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뭉크는 1863년 출생했다. 그가 산 19세기 말 유럽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불안하고 혼란한 시기의 연속이었다.

뭉크는 산업사회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산업사회의 이중성 가운데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 작품에 투영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간의 고독과 소외는 그를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뭉크는 노르웨이를 떠나 주로 독일에서 활동하였으며, 1892년 ‘베를린예술가협회’의 초청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 1주일 동안 뭉크의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형태와 색채 사용에 관하여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논쟁이 오히려 뭉크를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했다.

뭉크의 대표작품 중 ‘절규’(The Scream, 노르웨이어: Skrik)는 뭉크의 경험을 시각화한 것으로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절규란 무언가를 절절하게 부르짖는 모습을 뜻한다. 뭉크가 그린 ‘절규’는 공포스러우면서 놀라는 표정과 흘러가는 듯한 붉은 배경을 그려 내어 지금도 회자되고 패러디되는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일상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담겨있다. 뭉크가 표현한 ‘절규하는 사람’의 형태는 거의 해골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해골바가지 같은 얼굴은 뭉크가 박물관에 전시된 고통스러운 표정의 미라(mummy)를 보고 영감을 얻어 그렸다는 설이 있다. 뭉크는 1893년부터 삶과 사랑과 죽음에 관한 ‘생의 프리즈’을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뭉크는 이 연작을 통해 인간 감정의 모든 국면을 형상화시키고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려고 했다.

연작 가운에 대표적인 작품이 뭉크가 ‘생의 공포’라고 부르던 것을 표현한 ‘절규’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검푸른 해안선, 동요하는 감정을 따라 굽이치는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의 병치, 그리고 극도의 불안감으로 온몸을 떨며 절규하는 한 남자, 이 남자의 절규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고통에 대한 울부짖음이고, 뭉크는 이를 입 밖으로 표출시켰다.

뭉크는 끔찍한 공황발작을 경험했으며, 이를 계기로 충격파처럼 인물의 얼굴을 원초적 두려움의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일련의 요동치는 선을 통해 절규를 묘사하였다. 자신의 뒤에 걸어오는 두 명의 인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으로써 효과를 강조하였다. 즉 뭉크의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는 자신의 마음에서 기인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와류(渦流)같은 흐름이나 붉은 묘사 등은 그의 트라우마나 슬프고 암울하게 살아온 인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뭉크는 오슬로 교외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을 때 이 증상이 나타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아래에는 협만(峽灣) 피오르드(fiord)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뭉크는 화면을 사선구도로 나누어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고 강렬한 원색 사용으로 인간의 감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가 표현한 절규하고 있는 사람의 형태는 거의 해골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해골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로 꼽히는 영화 <스크림>의 모델이 되었다.

한 가지 주제를 반복해 다시 그리는 습관이 있었던 뭉크는 ‘절규’도 총 4연작품(連作品)으로 1893년 완성된 시리즈 첫 작품은 이미지적인 원작이다. 두 번째 작품은 1895년 완성된 석판화 형태다. 세 번째 작품은 1910년에 완성된 템페라 화법으로, 네 번째 작품은 파스텔로 그렸다. 1, 2, 3연작은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4번째 ‘절규’는 유일하게 민간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2012년 6월 소더비경매장에 등장하여 1억199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뭉크는 1893년 노르웨이 남부의 작은 마을 뢰텐에서 태어났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가혹한 운명과 마주해야 했다. 그가 5세 때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14세 때 누나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여동생은 우울증 치료를 받았고, 아버지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뭉크가 파리에서 살았던 188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남동생도 1895년 30세 나이로 사망했다. 뭉크 역시 허약하여 여러 질병으로 고생했다.

뭉크는 어린 시절에 부모의 매질을 당하고 호되게 혼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어릴 적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인해 피를 뿜고 세상을 떠나는 두려운 장면을 보게 된다. 뭉크 또한 성장하면서 결핵, 신경증 등을 앓았다. 평소 우울증을 겪었던 뭉크는 1908년 신경쇠약에 걸려 코펜하겐의 병원에 8개월간 입원했다.

뭉크는 말년에 시력을 거의 다 잃었으며, 80번째 생일이 지나고 몇 달 뒤인 1944년 1월 23일 오슬로 근처 에켈리의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일생 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다. 뭉크가 만년에 그린 작품들도 여전히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의 표현들로 일관되어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뭉크를 괴롭힌 신경증(神經症·neurosis)이란 내적인 심리적 갈등이 있거나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다루는 과정에서 무리가 생겨 심리적 긴장이나 증상이 일어나는 인격 변화를 말한다. 신경증은 기능성 장애 중에서 발병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더듬어 조사할 수 있는 심인성 질병이다.

신경증은 위기상황에 있어서의 일종의 인격반응이다. 신경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에는 불안장애를 비롯해 불안을 조정하려는 의도에서 억압, 전치, 반동(反動)형성, 방어기제가 동원되어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다. 억압은 불안을 다루는 심리적 방어기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또한 불면증, 두통, 심인성 위장 장애, 화병(火病) 등이 흔히 나타난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불안은 위기적 상황에 의해 야기되며, 위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불안을 회피하려고 하는 자아의 방위반응”이라고 했다. 프로이트는 “현대인의 특징으로 인지되는 인간의 불안은 그 근원을 알 수 없으므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또 “인간의 행동이 합리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무의식이 행동과 정서를 규정한다”고 말했다.

뭉크의 가족 중 아버지와 여동생이 우울증에 시달렸고, 뭉크 자신도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이라고도 불리는 정신질환이다. 우울증은 다양한 인지 및 정신·신체적 증상을 일으켜 일상 기능의 저하를 가져와 개인의 전반적인 삶에 영향을 미친다.

우울증의 평생 유병률(有病率)은 미국, 유럽 등은 10.1%~16.6%로 높다. 우리나라는 2011년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주요우울장애 평생 유병률이 6.7%로 나타났으며, 2006년 역학조사에 비하여 다소 높은 수준의 유병률을 보였다. 하지만 서구권 국가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 우울증은 30~40대에 가장 흔하지만 어느 연령에서나 발병할 수 있다.

우울증의 핵심 증상은 우울감과 삶에 대한 의욕 상실이며, 우울증 환자의 3분의 2가 자살을 생각하고 10~15%에서 자살을 시행한다. 우울증 환자의 90% 정도에서 불안 증상이 나타나며, 5분의 4 정도가 불면증 등 수면장애를 호소하며 성욕저하 등의 성적 문제를 보이기도 한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다른 정신질환과 같이 다양한 생화학적 원인, 유전적 원인, 생활 및 환경 스트레스, 신체적 질환이나 약물 등으로 조사되고 있다.

우울증 치료는 급성기 치료, 지속기 치료, 유지기 치료 등 세 단계로 나누며, 상담과 정신과 치료가 필수적이다. 즉 약물치료와 지지정신치료, 정신분석, 인지행동치료, 대인관계치료 등 정신치료적 접근을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약물요법은 항우울제, 항불안제, 수면제 등을 사용한다. 명상과 이완요법 등이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 알콜은 우울증 치료의 적이므로 반드시 금주하여야 한다.

뭉크는 1933년 70세 생일에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성 올라브 대십자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뭉크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오슬로에 기증했으며, 그의 작품은 1963년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뭉크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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