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작스캔들’ 속 천경자 화백 1주기전···‘인생-여행-환상’ 주제 따라 ‘자화상’ 등 100점

[아시아엔=정지욱 영화문화평론가, 가톨릭문화원 어린이영화제 <날개> 수석프로그래머, 한일문화연구소 객원 학예연구관] ‘작렬하는 태양, 화려한 칼라로 눈부시게 다가온 아프리카의 이국적 풍광.’

 

위 발문은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간 현대화랑 전시와 수필집에서 각인된 천경자 화백의 작품에 대한 국민(초등)학생 시절의 내 기억이다. 이후 중학생이 되며 독사와 꽃뱀이 가득한 이전 작품을 만나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화려한 화관을 쓰거나 똬리를 튼 뱀을 화관처럼 머리에 올린 여인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힐끔거리며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으면 절대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한국화단의 큰 별, 천경자화백 작품을 한자리서 만나다

 

01-1. 천경자 전시 포스터
천경자 1주기 추모전포스터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지난해 가을, 세상을 떠들썩하게 전해진 뉴스 중 하나가 천경자 화백이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1998년부터 체류하던 뉴욕의 자택에서 2015년 8월 6일 새벽 돌아가셨고, 화장해 뉴욕성당에서 조용히 장례가 치러졌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 화백은 1941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학했고, 1942년 제22회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가, 이듬해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가 연이어 입선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수묵화로 돌아가는 시류에서 ‘채색동양화는 왜색풍’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배척당하는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1954년 홍익대학교 동양화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후학을 가르쳤고, 20년 후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 1974년 학교를 사직하고 신촌에 화실을 낸 뒤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등을 지내며 작가로서 성공을 거뒀던 천 화백은 1991년 ‘미인도’ 사건으로 절필선언을 한 뒤,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3점을 기증하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국화단의 큰 별이던 천경자 화백의 1주기를 추모하는 전시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가 6월 14일부터 8월7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그녀가 서울시에 기증한 93점의 작품을 비롯해 개인 소장품 등 100여점의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귀한 자리로 마련됐다. 오래 전 천 화백에게 배웠던 제자들은 물론 평소 그녀의 작품을 아끼고 응원했던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임은 당연하다.

 

11. 베트남 종군화가단 시절_유족(차녀 김정희) 제공
베트남 종군화가단 시절, 개인소장(차녀 김정희 제공)

?인생-여행-환상, 그리고 천경자에 대한 기록

 

이 전시는 ‘인생-여행-환상’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꾸며진 전시실과 아카이브 섹션으로 이뤄졌다. 첫 주제인 ‘인생’은 학생이던 동경여전 1학년 때 그린 작품부터 둘째 아들의 모습을 그린 ‘모기장 안에 쫑쫑이’(1950년대, 종이에 채색, 94X134cm, 개인소장)와 ‘고’(1974, 종이에 채색, 40X26cm, 개인소장), ‘내 슬픈 전설의 122페이지’(1977, 종이에 채색, 43.5X36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막은 내리고’(1989, 종이에 채색, 41X31.5cm, 개인소장) 등 대표적인 자화상과 여인상, 드로잉, 그리고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서로 얽혀있는 ‘생태’(1951, 종이에 채색, 51.5X87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등 천경자 화백의 인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작품의 흐름을 엿볼 수 있도록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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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1974, 종이에 채색, 40X26cm, 개인소장)

특히 ‘생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 아버지와 동생 옥희 죽음, 남편과의 사별 등 순탄치 못한 개인사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그렸던 작품으로 한국화단에서 천경자를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작품이다.

두번째 주제는 ‘여행’이다. 1969년 8월, 유럽과 남태평양에 걸친 8개월간의 첫 해외여행 이후 아프리카, 남미, 인도, 미국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받은 영감을 화폭에 옮긴 풍경화와 크로키 등으로 꾸며졌다. 유럽여행 중 만났던 회화작품들의 세밀한 소묘력에 도전받아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밀도 높은 작품인 ‘이탈리아 기행’(1973, 종이에 채색, 90.5X72.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그리고 살고 싶다는 집념 속에서 아프리카 곳곳을 누비며 이색적인 풍물과 동식물들을 접했던 천 화백이 자연에 완벽하게 동화된 듯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초원II’(1978, 종이에 채색, 104X129cm, 개인소장)를 만날 수 있다. 또 ‘키웨스트’(테네시 월리엄스의 집)(1983, 종이에 채색, 37.3X4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 종이에 채색, 40X31.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등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갈대 수색작전’(1972, 종이에 채색, 28X37.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등은 1972년 베트남에 ‘종군화가단’으로 20일 동안 파월되며 그린 작품으로 눈여겨 볼 만하다. ‘갈대 수색작전’은 군인의 모습이나 베트남 거리의 스케치를 남겼다. 귀국 후 이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월남전 기록화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 전시실에서는 세계 곳곳을 다녔던 천 화백의 여정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여러 색의 레이블을 제작해 대륙이나 나라별로 구분하여 관람객 이해와 편의를 돕고 있다.

마지막 주제인 ‘환상’에서는 ‘초혼’(1965, 종이에 채색, 153X12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백야’(1966, 종이에 채색, 134X94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와 같은 몽환적인 색채와 강한 필치가 담긴 1960년대 작품들과 미완성으로 남은 ‘환상여행’(1995, 종이에 채색, 130X61.5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등을 만날 수 있다. 천 화백이 꿈꿨던 사랑은 무엇일까? 이상향은 무엇일까? 그녀의 얘기를 들을 수 없는 지금 우리는 남겨진 작품들과 글 등의 기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천 화백이 화폭에 담았던 ‘환상’의 세계는 단순히 미지의 그곳이 아닌 우울하고 견디기 힘들던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치유의 세계이며 안식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주제의 전시실에서 만나는 작품들을 통해 관람객들은 어렴풋하게나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내 슬픈 전설의 1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43.5X36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내 슬픈 전설의 122페이지’ (1977, 종이에 채색, 43.5X36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평상시 ‘천경자 상설전시실’로 사용됐던 전시공간을 이번 전시에는 ‘아카이브 섹션’으로 꾸며놓았다. 커다란 사진과 함께 화구들을 연출해 천 화백이 작업하던 모습을 재현했고, 천 화백이 남긴 수필집과 기고문, 삽화, 관련 기사, 사진, 영상 등을 모아놓았다. 서정주 시인의 시 ‘지낸달의 접시꽃과 새달의 국화새이’의 삽화가 실린 1957년 9월 21일자 경향신문부터 서울시에 작품 기증소식이 실린 1998년 11월25일자 매일경제신문까지 언론의 기록들을 흰색 아크릴판에 전사하고 안쪽에서 조명을 해 관람객들이 편안하고 다양하게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또 ‘탱고가 흐르는 황혼’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등 10여권의 저서와 화집, 그리고 표지화로 사용된 여러 문예지와 다양한 사진들을 연표와 함께 만날 수 있다. 화가였지만 수필가로도 활동해 수많은 팬을 남겼던 천경자 화백은 수필집 <자유로운 여자>에서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인생이 떠있는지도 모른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번 추모전시의 제목은 바로 이 대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진 가운데에는 장남 이남훈에게 그려준 새뱃돈 편지봉투나 맏며느리에게 보낸 엽서 등이 있어 세심하게 관람하면 천 화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전시 관람 즐거움을 몇 배 더 키울 수 있을 것이다.

 

10. 황혼의통곡
‘황혼의 통곡’ (1995, 종이에 채색, 96X129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아직도 스캔들 中, 이 전시 통해 새 평가를 기대하며

 

14. 유족(차녀 김정희) 제공_ 사진 문범강
천경자, 개인소장 (차녀 김정희 제공), 사진 문범강 촬영

얼마 전 이 전시는 또 다시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며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천 화백의 ‘미인도’ 진위 공방을 수사해온 검찰이 이번에 전시중인 작품 일부를 전격 압수했기 때문이다. 1998년 서울시에 직접 기증한 뒤 유족 뜻에 따라 한 차례도 외부에 반출되지 않았던 이 작품들에 대해 지난 6월26일 전시 시간이 끝난 시점인 오후 7시를 넘겨 전격적으로 압수가 이뤄졌다.

압수된 작품은 ‘내 슬픈 전설의 122페이지’ 등 대작 2점과 소품 3점으로 검찰은 “천 화백의 ‘미인도’의 진위 판별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자외선, 적외선 비교분

석 대상으로 쓸 수 있는 참고용 그림을 확보해야 했다”며 “신속한 조사를 위해 압수수색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작품들은 상자에 담아 포장해 뒤 무진동(無振動) 트럭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옮겨져 휴관일인 27일 자외선 및 적외선 비교분석을 했다. 조사를 마치고 당일 늦은 밤 전시장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 중인 작품이 검찰에 압수수색된 초유의 사태로 유족이나 미술계는 물론 법조계 안팎에서 일어난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는 비록 미술계와 사법계가 스캔들에 휩싸여 있지만,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깊이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특히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평가의 계기가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보관 중인 천 화백의 작품을 한자리에 내놓았다. 평소 마련된 상설전시관 공간이 부족해 일부 작품을 번갈아 공개했던 것에 비춰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무료관람으로 공개되는 이 전시는 지난 6월28일 미술사학자 이태호 명지대 교수가 강연을 했고, 이후에도 어린이 교육프로그램과 심포지엄 등이 마련됐다. 전시는 요일에 따라 평일 저녁 8시, 토·일·공휴일엔 7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매달 첫째·셋째주 화요일은 ‘뮤지엄나이트’로 밤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다만 마감 1시간 전까지는 입장해야 관람이 가능하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 스케치, 촬영 정지욱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 스케치, 촬영 정지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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