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혼·땀이 빚은 ‘보리밭의 누드’···박생광·천경자·김기창 잇는 ‘한국채색화 으뜸’ 이숙자 화백
“처음 전시를 제안받을 때 전시장에 작업실을 꾸미는 것과 미완성된 작품을 함께 두는 것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측으로부터 요청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미완성인 작품을 전시기간 동안 전시장에서 작업하겠다고 얘기했을 때 미술관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당황했죠. 하지만 제 작업실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는데, 제가 이곳에서 작업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쉽게 생각해 특별한 게 아니라 이동작업실에 매일 나가며 작업하는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죠.”
붓과 접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암채재료가 담긴 병 등 화구, 스케치는 물론 얼마 전 비로소 완성한 작품까지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전시실에서 만난 이숙자 화백은 환한 미소를 부드럽게 지어보였다.
한국 전통채색화 맥 이어온 대표작가
지난 3월 25일부터 7월 17일까지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의 한국화 부문 전시 초대를 받아 ‘초록빛 환영_이숙자’ 전을 개최한 지향(芝鄕) 이숙자(74·李淑子) 화백은 우리나라 화단에서 채색한국화의 전통성을 이어온 대표작가다.
이숙자 화백은 홍익대에서 수학하며 천경자(千鏡子, 1924~2015), 김기창(金基昶, 1913~2001), 박생광(朴生光, 1904~1985)과 같은 근대 한국채색화의 맥을 이은 스승들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는 1963년 대한민국대전에서 입선한 이후 지금까지 채색화에 대한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50년 화업을 총망라하는 대표작은 물론 드로잉과 자료 등 60여점이 소개되는 전시가 네달 동안 계속된 것이다. 전시기간에도 거의 매일 전시장에 옮겨놓은 작업실에 나와 그동안 미완성이던 작품을 마침내 완성시킨 이 화백의 삶과 예술에 대해 물었다.
어린 시절 이숙자, 그녀 곁엔 언제나 미술이 있었다.
Q. 어린 시절부터 미술과 인연이 깊었나요? 어떻게 미술을 시작하게 됐나요?
A.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미술’이란 것이 따로 없었어요. 하지만 제겐 미술에 대한 특별한 기억,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봤던 동화책의 ‘엄지공주’가 제비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처럼 본문보다 삽화의 기억이 또렷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전쟁 때 피난 가서 1년간 지냈던 옥천에서 자연환경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나 그림을 그려오라는 숙제에 교과서를 보고 그대로 그려간 그림이 교실 뒤를 모두 장식했던 경험이 그것이죠.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자란 겁니다, 그림을 그리며 가슴이 설렌 것은 물론 <학원> 잡지에 실린 소설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의 삽화를 보면서도 설레었습니다.
나중에 숙명여중에 진학해서 조각가 윤영자(尹英子)선생님께 배울 때 노트 마크로 인쇄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석고덩어리 조각으로 만들어 칭찬을 받았어요. 당시에는 책을 보고 그리는 데생을 했는데, 미술 점수가 100점이었어요. 자신감을 갖게 된 거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당시 활발했던 우리 숙명여중의 미술반에 들어갔는데, 그게 내가 미술을 하게 된 바탕이 된 거죠. 그 후 가세가 기울어 교육대학에 들어가 교사가 됐지만, 다시 홍익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Q. 과거 한국화단에서 외면받던 채색화로 작품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처음엔 저도 서양화밖에 몰랐죠. 당시 미술교육이 중등교육까지 한국화나 전통미술에 대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저 역시 서양화를 하고 있었고, 서양화 학과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산(對山) 김동수(金東洙, 1935~2011)선생님을 알게 되면서 동양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중고교 시절 천경자 선생님께서 내신 수필집을 읽으면서 화가의 꿈을 지니게 됐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채색화는 ‘일본의 잔재 또는 영향’이라는 의식이 남아있었어요. 화가로 활동하며 채색화에 대한 잘못된 평가에 반발해서 채색화의 정통성을 알리는 “채색화는 우리 그림이다”라는 주제로 학회에서 발표하거나 글을 쓰고 책으로 내고 했지요. 저는 채색화로 국전에 작품을 내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매년 출품하며 채색화 작업을 계속하게 됐습니다.
보리밭, 소, 그리고 이브···숨쉬는 보리밭서 누런 소가 뛰어나올듯
Q. 보리밭이 없는 이숙자, 이숙자가 그리지 않은 보리밭···.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선생님의 보리밭은 특별한 작품입니다.
A. 작품을 하면서 에너지를 많이 투자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그런 소재가 뭘까 궁리하게 됐어요. 그동안 인물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올곧게 받아줄 수 있는 소재가 뭘까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보리밭을 만나게 됐습니다. 1977년 여름 경기도 포천에서 만난 보리밭에서 받은 정서적 충격은 그 느낌이 매우 강렬해서 아찔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보리만 그린 것은 아니고 전국의 보리밭을 스케치 하다 만난 소와 학생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인체데생의 누드처럼 여러 소재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보리밭을 그리다 소와 같은 다른 소재로 갔다 다시 보리밭으로 돌아오고, 또 이브시리즈 작품을 하다 또 다시 보리밭으로 돌아오고, 보리밭과 이브가 만나 새로운 작품을 그렸죠. 그 중간에는 ‘석보상절’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도 있었지만 결국 보리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작품을 계속 이어간 것입니다.
화가이자 교육자, 아쉬움도 부족함도 없다···”전시 중 제자라며 찾아와 인사해 그 보람에 살 맛”?
Q. 선생님은 화가이시지만, 평생을 교육자로 사셨습니다. 화가이자 교육자로 선생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A. 교육대학에서 10년 있었는데, 이곳은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곳이고, 이후 고려대에서 교육자이면서 작가를 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심화시켰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교육자와 화가로서의 인재를 양성했다고 하겠습니다.
제 생활은 그림 그리는 일과 교육하는 것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살림을 하는 가정생활이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생활은 없었어요. 화가로서 그림 그리는 것만큼 교육자로서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바쳤다고 나름 자신합니다. 그때가 1990년대였는데 고려대에서 화가와 교육자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그림 그리는 작업과 조화가 필요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학교와 학생들을 생각하느라 내 그림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즉 밀도 있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그림보다 실험적이거나, 앉아서 하면서도 보다 빨리 작업결과가 나오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겁니다. 90년대엔 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든 고려대 출신들을 만나면 참 반갑습니다. 현대미술관에서도 저의 학생이었다며 인사 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열심히 잘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자랑같지만 수강생들의 교수평가에서 ‘우수강의 상’을 교육대학원에서 받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수업의 밀도가 아주 높다고 평가했다고 합디다. 그리고 정년퇴임하던 해에 ‘석탑강의상’을 받았습니다. 운이 두 번씩 오는 것은 아닌데, 강의를 잘하기는 잘 했나 보다 생각합니다.(고려대의 ‘석탑강의상’은 교수평가 상위 5% 안에 드는 교수가 받을 수 있다) 저는 교육자로 즐겁게 생활 했고, 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해서 아쉬움이 없습니다.
Q. 최근 한국화단에서 일어난 위작, 대작 등 여러 스캔들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A. 조영남씨 대작사건 때 “선생님도 대작을 하세요? 연세도 있으신데 큰 작품을 혼자 하시네요?”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조영남씨의 사건은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화가들에게 뒤통수를 친 격입니다. 일반 화가들이 대작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반 화가들의 작품이 제대로 팔리지 않는 상황인데 대작을 시킬 수가 없는 거죠. 젊은 작가들은 물론 이름 없는 원로 전업작가들 중에도 작품 거래가 없어 수입이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에서 적은 돈이더라도 지불하며 대작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이게 80% 이상이고 화단의 현실이죠. 조영남씨는 화가라고 할 수 없고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입니다. 그런 유명세로 그림을 그려 판매한 것이라 하겠죠. 아직 많은 전업화가들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상황에 이런 대작문제를 일으킨 것은 분명히 많은 화가들에게 몹쓸 짓을 한 거라 생각합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숙자의?꿈은 계속된다”?
Q.?50여년 화업을 하시면서 많은 작품을 만들고 일도 참 많이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것 더 해보고 싶은데’ 하며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A. 젊은 시절 <타임>지 커버에 나오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타임은 아니라도 국내 주간지의 커버로 나왔습니다. 젊은 시절 꿈을 가진 것에 대해 후회가 없습니다. 저는 집에 ‘세상 세(世)’자를 써서 붙여놨습니다. 지금은 그 붉은 색이 다 바래서 보일락말락 하지만···, 1980년에 ‘난 세계적인 작가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썼습니다. 남들이 알면 허황된 꿈을 가졌다 하겠지만 말이죠.
요즘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꿈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고 그 힘든 그림을 왜 그릴까요? 나는 화가란 직업이 너무 좋습니다. 그건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꿈으로 인해 ‘세상 세’ 자를 볼 때마다 ‘맞아, 그렇게 될 거야’ 하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꿈을 버리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꿈을 꾸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허황된 꿈이라도 현실감으로 다가오게 계속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이죠.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그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봐요. 앞으로도 어떤 꿈을 꿔야겠죠? 그걸 현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세계적인 작가’라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 상상만 해도 뿌듯합니다. 이제는 박서보 선생님이나 하종현 선생님처럼 나도 세계적인 작가로, 내 꿈이 현실감 있게 내게 다가오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그 꿈이 이뤄지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럽겠지만,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추억처럼 잘 간직할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습니까.
한 시간 가량 진행하리라 마음먹고 만난 이숙자 화백과의 인터뷰는 녹음 시간만 4시간반을 훌쩍 넘겼다. 그는 내게 그림을 대하는 자세, 삶을 살아가는 태도 등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아끼지 않았다. 칠순의 연세에도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하고 그 어려운 미술작업을 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2011년 크게 아파 한동안 쉬었던 것이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그는 또 항상 복용하는 비타민과 일주일에 세 번은 하는 PT(Physical Training)운동은 근력을 키우는 자산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일이든 놀이든 사람에겐 휴식이 필요한 것이리라. 이번 전시가 아니더라도 이숙자 화백의 작품을 만나면 ‘사색과 소통’의 화두에 담긴 찰라의 휴식을 경험하고, 문화적 근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백두산’처럼 웅장한 작품이 주는 거대한 메시지에서 ‘청보리’의 은은한 바람 결 느낌이 이 화백을 인터뷰한 지 보름이 지나도록 내 곁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