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영 조선일보 고문 별세···’아침을 두려워한’ 그는 진정한 ‘신문인’이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신문인’ 조선일보 상임고문 방우영이 타계했다. 방우영은 형 방일영과 함께 조선일보를 ‘한국 제일의 신문’으로 만들었다. 방 고문의 별세를 계기로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일제 하에서도 민족언론을 이어간 방우영의 양조부 계초 방응모가 재조명되어야 한다. 방우영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여겨지던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다.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이들과는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不俱戴天) 사람들은 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로 지주와 기독교인이었고, 남한에서 반공의 선두가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조선일보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각 부문, 특히 정치 인재의 산실이었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정계에 들어가 성장한 경로와 남긴 업적은 다를 지라도 이들을 제외하고서 한국의 정치를 말할 수 없다. 이들의 정체성(identity)은 뚜렷하다. 고등고시에 못지않은 엄격한 전형을 거쳐 입사한 기자들은 데스크에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부장이 되기까지 겪는 과정은 혹독하다. 엉터리는 생존할 수 없다. 편집국장은 수십년 선배, 동료, 후배들의 종합 평가로 선발된다. 논설위원은 논문을 쓰는 학자와 달리 몇 시간 내로 사설이나 칼럼을 써야 한다.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분들이 논설위원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들을 평가하고 선발하며, 회사 경영을 해나가는 것은 사장, 회장 등 경영자의 몫이다.
방우영의 8순 회고록 제목 <아침이 두려웠다>라는 말대로 신문은 독자에 의해 하루하루 평가가 난다. 대기업 이사가 연 단위로 up or out가 가려진다면, 중소기업은 월 단위, 신문은 하루하루 성패가 난다. 방우영은 재벌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조선일보를 만들기 위해 신문인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나름 결과도 얻었다. 조선일보의 자산인 ‘양질의 언론인’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방패와 토양은 ‘신문인 방우영’이 담당한 덕분이다.
조선일보는 연세대, 동아일보는 고려대와 인연이 많다. 관학인 국립 서울대보다 사학의 쌍벽인 고려대, 연세대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바가 더 크다. 서울대 출신은 고시를 거쳐 관료로 성장하는 것이 꿈이다. 정계에 입문하더라도 그 흔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서울대 출신이라도 언론계에서 훈련받으면 달라진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 김구, 이회영이 민족의 영수로서 건국의 초석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내에서 육영과 언론, 흥업에서 인재를 양성한 인촌 김성수와 계초 방응모가 아니었다면 해방 후 한국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그들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친일파로 지탄되는 행적도 감수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제 그들을 인정하는 역사인식을 갖는 세대가 되도록 해야 한다.
방우영의 타계를 보며 언론인, 신문인의 역할과 기여, 역사적 가치와 위치를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