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결선투표’보다 당내 민주주의가 우선이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전무후무한 비례대표 5선을 차지한 김종인 대표가 “합의 추대하면 당대표를 하겠다”고 나오자 정청래 의원이 “우리가 북한의 노동당이냐”고 쏘아붙였다. 나아가 “돈 먹고 감옥 간 사람은 대표에서 배제하여야 한다”고 김종인의 아픈 데를 건드렸다. 민주정당에서 당대표는 전당대회에서 경선으로 선출해야 되는데 경선을 하다가 당내 갈등이 일어나면 안 되니 합의 추대를 해야 된다면, 대통령도 국민이 합의 추대해야 되느냐고 묻는다. 국보위에서 활약해온 김종인은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자 전두환이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된 것에서 힌트를 얻은 모양인데 77세 노인이 셀프 공천, 셀프 추대 등 여러 가지 한다.

1945년 9월 박헌영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성립되었다.(북한에서는 이날을 조선로동당 창당일로 참칭한다) 이 조직이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같은 해 8월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가 1949년 6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과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이 통합, 조선로동당이 된다.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윤공흠 등 연안파에 의해 김일성 독재 비판이 벌어진다. 이는 그해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가 비판받고 동유럽에서는 민주화운동의 선풍이 분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회의에서 중앙위원들 다수는 김일성을 옹호했고 도전에 실패한 연안파는 도주했다. 놀란 소련에서는 외상 미코얀, 중국에서는 국방부장 팽덕회를 보내 봉합한다. 이를 ‘8월 종파투쟁’이라고 한다.

1945년 9월20일 스탈린에 의해 지명되어 북한의 왕자로 군림해온 김일성의 북한에서는 전무후무한 정권 차원의 투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연안파, 소련파가 몰락하고 김일성 직계 항일유격대 계열만이 남았다. 김일성의 권력은 더욱 탄탄해졌고 이후 수령 유일체제로 굳어진다. 8월 종파사건은 북한에서 이른바 중앙 집중제 등의 당내 민주주의가 기능한 마지막이었다. 이후에는 회의가 아니라 총과 칼, 비밀경찰만이 권력을 지탱했고, 눈 밖에 난 자는 최고급이라도 파리 목숨이었다. 그 광폭함은 김정일을 거쳐 정은에 이르러 극에 달하고 있다.

김정은이 오는 5월 7차 당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당대회는 김일성 시대인 1980년 10월 6차 당대회 이래 한번도 열리지 않았는데 이번에 36년만에 열리는 것이다. 김정은으로서는 당대회가 부담 될 것이다. 경제 건설의 실적은 없으니 핵과 미사일로 도배하려는 것이 이 때문이다. 현재 공산국가에서 중앙위원회가 명실 공히 유지되는 곳은 중국 공산당 뿐이다. 중앙위원에서 정치국, 다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라가는 단계를 거쳐 엄중한 인재 검증과 심층 토의를 통한 ‘중국식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평한다.

심지어 공산당에서도 민주정치가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자율권을 제약하는 당론 결정권과 공천권, 재정권의 막강한 권력을 쥔 보스의 눈 짓 하나로 움직이는 한국 정당에서는 우선 당내 민주주의가 시급하다. 이제 당내 민주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의하는 자세를 보고 싶다. 대선에서 결선 투표제가 급한 것이 아니다.

당내 민주주의의 정립, 이것이 ‘새정치’의 기본이고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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