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성의 커피종교학] 커피 한 잔에 담긴 흑인노예의 슬픈 눈물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주 고지대에서 커피열매를 수확하고 있는 노동자. 불과 70여년전까지 커피농장에서 흑인 노예를 혹사시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잘 익은 커피를 수확한 노동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주 고지대에서 커피열매를 수확하고 있는 노동자. 불과 70여년전까지 커피농장에서 흑인 노예를 혹사시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잘 익은 커피를 수확한 노동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사진=CCA>

[아시아엔=최우성 인덕대 교양학부 외래교수, 커피비평가협회(CCA) 서울본부장] 전세계 커피의 25% 가량을 소비하는 미국도 처음엔 차(Tea)가 기호음료의 주류를 이루었다.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영국인들이 차를 마시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양이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1790년대에 250만 파운드 정도였던 미국의 차 수입은 100년 뒤에는 9,000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은 차에 붙는 세금을 영국정부에 내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드디어 보스턴 항구에서 인디언 복장을 한 독립주의자들이 차를 가득 담은 부대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13개주가 연합하여 영국정부를 상대로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보스턴 차 사건을 애국심의 발로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사실 차보다 비쌌던 커피의 가격이 많이 내려간 시대적 상황도 한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이 되면서 1인당 차 소비는 1.25파운드로 줄고, 커피는 11.5파운드로 늘어난다. 이때 미국은 전세계 커피의 40%를 소비하는 블랙홀로 등장한다. 1950년대에 들어서 미국인들이 마신 커피는 전세계 커피 소비량의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미국인이 이처럼 커피를 많이 마신 이유를 노예제도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미국은 아이티(Haiti)에서 흑인 노예들을 이용해 엄청난 양의 설탕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티의 자작농과 해방노예들은 설탕 플랜테이션을 세울 능력이 없었고, 그보다 규모가 작고 돈도 적게 드는 커피농장을 가꾸기 시작했다. 곧 커피의 유행과 함께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자, 아이티에서는 엄청난 커피가 생산돼 커피 값이 떨어졌고 일용직 노동자들까지 커피를 즐기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한참 커피에 맛들이기 시작할 때 변수가 생겼다.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고, 여기에 고무된 아이티 노예들이 1790년대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자유를 얻은 해방노예들은 더 이상 커피농장으로 돌아가거나 커피를 생산하지 않았다. 커피의 공급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커피 값이 폭등했다. 이 틈새를 브라질이 파고들었다. 1809년 마침내 브라질 커피가 처음으로 미국에 상륙했고, 19세기 중반엔 미국에서 소비되는 커피의 3분의2가 브라질에서 수입될 정도였다.

1830년대에 들어 전세계적으로 커피 수요가 급증하면서 브라질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커피 농장에서 일할 아프리카 노예들을 더 많이 필요로 했다. 커피농사는 노동집약적이다. 사람이 일일이 커피를 수확하고 가공해야 하는 것이다. 브라질은 많은 노예를, 미국은 많은 커피를 필요로 했다. 1840년대 초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로 가는 노예의 5분의1정도는 미국 배들이 운반했다.

미국인들이 커피를 많이 마실수록 흑인노예들은 브라질 커피농장에서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이들은 잔혹한 노동의 강도를 견뎌야 했다. 일을 마치면 좁디좁은 숙소에서 짐짝처럼 지냈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커피생산국에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슬픈 역사가 남아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자신들을 끌고 온 이들의 종교인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노예생활을 견디며 흑인 고유의 음악성과 영성으로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이것이 흑인 영가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깊은 강 내 집은 저 강 건너

깊은 강 주 나 그곳에 가기 원합니다.

복음의 잔치에 그대 가지 않으려오

언약의 땅 평화의 그곳 오 깊은 강

깊은 강 주 나 그곳에 가기 원합니다.”

노예로 끌려와 슬픈 삶을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유란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한이 서려있다. 죽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커피농장에서 끔찍한 착취에 시달렸던 흑인 노예들… 유럽과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백인들의 잔에 담긴 향기로운 커피는 흑인 노예들의 눈물이었다.

커피 한 잔 속에는 흑인노예의 슬픈 눈물이 담겨 있다.

칸디도 포르티나리의 커피농장 노동자. 브라질 상파울루 인근에 있는 커피 농장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칸디도 포르티나리(1903~1962)가 1935년에 그린 유화작품 ‘커피농장 노동자’. 큰 커피생두 자루를 힘겹게 운반하는 소작농들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립미술관 소장
칸디도 포르티나리의 커피농장 노동자. 브라질 상파울루 인근에 있는 커피 농장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칸디도 포르티나리(1903~1962)가 1935년에 그린 유화작품 ‘커피농장 노동자’. 커피생두 자루를 힘겹게 운반하는 소작농들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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