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박람회의 모든 것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
[아시아엔=김아람 기자] 820만3956명. 지난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를 찾은 방문객 수다. 1993년 대전엑스포 이후 두 번째로 한국에서 열린 박람회에 대한 전세계의 반응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과거 ‘박람회’의 취지는 과거 정보 및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시절 각국의 최신 기계류와 생활용품 등의 전시를 통해 활발한 국제교류를 펼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등장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즉각적인 공유가 가능해지자 박람회가 ‘전시장’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강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람회는 ‘대중문화’ ‘기업화’ 등의 현대적 개념을 만들어내고, 텔레비전, 전화기, 케첩 등의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낸 인류문명 발전사의 산증인이다. 즉 박람회의 역사는 현대문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51년 영국 수정궁박람회를 시작으로 최근의 여수세계박람회까지 국제박람회기구(BIE)가 공인한 총 67개 박람회의 역사를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오룡 저, 다우출판)에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박람회의 4단계 진화
박람회의 역사는 크게 4개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이 돼, 산업혁명으로 이룩한 각국의 기술을 대내외에 홍보하고, 자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됐다. 이후 20세기에 미국이 박람회 개최국으로 등장하며 그 판도가 뒤집어진다. 과거의 업적을 중심으로 알린 기존 박람회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서막을 미국이 알렸고, 실제로 1900년대에는 박람회 대부분이 미국에서 개최됐을 정도였다.
세계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1958년 벨기에 브뤼셀박람회를 시작으로 다시 한번 새로운 막이 열렸다. 그동안 찬양해 마지 않았던 과학기술의 발달이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주춤했던 박람회는 ‘인류에 봉사하는 과학기술’과 ‘현대 세계의 인간성 회복’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후 아시아 최초로 일본이 1970년 오사카박람회를 통해 패전 25년 만에 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이후 1992년, 국가브랜드 가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박람회 제4막’이 올랐다. 한국 역시 1993년 대전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전쟁의 암울한 이미지를 벗고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임을 전세계에 알렸다.
한국 최초 해외박람회 참가, 공식기록 1893년보다 10년 앞섰다
한국의 세계박람회 공식 참가 기록은 1893년 미국 시카고박람회로 전해지고 있지만,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에 따르면 그보다 10년 더 이른 1883년 이미 박람회에 참가한 이력이 있다고 한다. 당시 명성왕후 조카 민영익을 포함한 총 11명의 한국 최초 외교 사절단(보빙사)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 보스턴 박람회에 참관한 것이다. 이 박람회는 소규모 산업 전시회에 불과했지만, 사절단 일행은 조선에서 가져온 화병과 주전자 등 특산품 몇 점을 전시물로 내놓았다고 한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박람회’는 그 뿌리와 역사가 깊다.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는 우리가 다소 ‘덜’ 중요하게 여겼던 ‘박람회’가 지난 160년간 인류와 국제사회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해왔는지 깨닫게 해준다.
또한 박람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자리잡아 지역경제 발전에도 이바지한다. 여수세계박람회는 2012년 이후 지금까지 매년 많은 방문객을 끌어 모으며 지역경제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단순히 기술발전상과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관광단지로 거듭나며 지역의 랜드마크로 거듭나는 박람회. 박람회가 향후 어떤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지 주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