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병과 ‘욱’ 하는 한국인③] 연간 11만명 ‘발생’···알콜·카페인 대신 세로토닌·도파민 등 항우울제 ‘효과’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동양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희(喜, 기쁨)ㆍ로(怒, 화남)ㆍ애(哀, 슬픔)ㆍ구(懼, 두려움)ㆍ애(愛, 사랑)ㆍ오(惡, 혐오)ㆍ욕(欲, 욕망)의 일곱 가지로 설명하면서 이들을 한데 묶어 칠정(七情)이라고 한다. 성리학자들은 인간이 타고난 감정이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에 어릴 때부터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화병(火病)은 우리나라 민간에서 ‘분노가 쌓여 생긴 병’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즉, 화병은 화가 나고 화가 쳐 오르지만 화를 삼키고 화를 내지 못할 때 화병이 생긴다. 정신건강의학에서 화병은 명치에 뭔가 걸린 느낌 등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憂鬱症)의 일종으로 분노와 우울을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 질환이다.
화병은 질병의 발생이나 증상의 출현에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적인 배경이 영향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어 미국의 정신의학회에도 ‘hwa-byung’이라는 우리말 그대로 등재되어 있다. 매년 우리나라 국민 약 11만6천여명이 화병으로 진단을 받고 있으며, 이중 여성의 비율이 전체의 61%를 차지하고, 40-50대의 중년층이 가장 많다. 이는 여성들이 화를 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화병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가 원인이며,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로 인해 세로토닌 등 뇌의 신경회로에서 신경전달물질에 이상이 생기고, 이것이 우울감, 불면, 식욕저하, 의욕상실 등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또한 화병의 특징적인 신체 증상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숨쉬는 것이 답답하고 가슴이 뛰는 증상이 생기기도 한다. 몸 여기저기에 통증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자살에 대한 생각이 증가하여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게 될 위험도 있다.
화병 치료는 항우울제(抗憂鬱劑)가 주로 사용되며, 뇌세포의 연결 부위인 시냅스에서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차단시키는 약물들이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세로토닌 외에도 노르에피네프린이나 도파민 등에 작용하는 항우울제도 치료 효과가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병 예방을 위하여 규칙적인 생활습관, 운동 등이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줄 수 있다. 또한 취미생활도 스트레스 관리에 도움이 된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는 것은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포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식생활에서 알코올, 카페인 등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약물은 피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해 음주를 하는 경우가 흔히 있으나, 음주가 계속될 경우 오히려 예후가 나빠질 수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는 화날 때 거친 말 표현이 익숙해 있지만, 미국에선 언어폭력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영국인들은 감정을 다스리고 어떤 경우라도 차분하게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냉정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우리나라 사람은 ‘감정 절제’보다 ‘감정 무절제’에 기울어 있다. 국민 65%가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서 거주하지만 이웃을 위한 배려는 너무나 부족하다. 이에 어릴 때부터 감정 절제를 가르쳐야 ‘욱’해서 일으키는 사회문제가 줄어들 수 있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사회폭력 예방을 위해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 전체가 노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