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박원순·안철수·김문수님 등께 일독을 권합니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아도 세상이 알게 된다”는 뜻이다. “원래 주머니 속에 넣은 뾰족한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그 끝이 주머니를 뚫고 비어져 나온다”는 <사기> ‘평원군전’(平原君傳)에 나온다.

전국시대 말엽, 진(秦)나라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宰相)인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명을 뽑지 못한 채 고심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나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어이없어 하며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하고 물었다.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일이 없지 않소?”

모수가 말했다.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송곳 끝뿐이 아니라 자루(炳)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다. 이윽고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으로 환대받으며 구원군을 얻었다.

그런데 세상은 저마다 잘났다고 난리 법석이다. 도무지 ‘능력과 재주’를 보여주지 못해 안달을 하는 형국이다. 부처님께서는 “나(我)라는 상을 내지 마라(我相)”고 했다. 그런데 중생은 아상이 있기에 보는 바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바가 어리석을 밖에 없다.

그 어리석음 때문에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누구나 평등한데 어리석은 중생은 부질없이 아상을 낸다. 만일 중생이 아만(我慢)을 일으키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높이려 하나 도리어 낮아지고, 지혜롭지 못한 자 역시 스스로 자랑하나 도리어 천해지기 마련이다.

만물은 아무리 뛰어나도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만이 조그마한 재주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한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감추고 들어내지 않는다. 그리고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인생에는 우리가 모르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능력과 재주’는 감출수록 커지고 들추어 낼수록 작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단점은 꼭꼭 숨기고 장점은 자랑한다. 그러면 장점은 점점 사라지고 단점은 커진다. 단점은 들춰내면 장점은 커지고 단점은 사라지는 것이 인생 법칙이다.

사람들은 왜 자랑을 하는 것일까? 아마 남 위에 서고 싶기 때문이다. 자식 자랑, 남편 자랑, 마누라 자랑, 재산 자랑, 크게 떠벌리는 사람일수록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자랑할 때 자칫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열등감이 비수로 돌아올 수도 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감추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항상 겸손하는 것이다. 장미꽃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는다. 물은 자신이 담길 그릇을 가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겸손은 자기 자신을 부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선행을 자랑삼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선량하고 현명한 사람의 특징은 언제나 자신이 모자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더 많이 배우려 하고 결코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남을 가르치려 들고 남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 자신의 모자람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의 덕(水德)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장애물이 있어도 물은 거침없이 흐른다. 둑이 있으면 흐름을 멈추고 둑을 없애면 물은 다시 흘러내려 간다. 물은 둥근 그릇이나 네모난 그릇을 가리지 않는다. 물은 언제나 여유로우며 활달하기 그지없다.

그런 사람은 자기 힘을 알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과 능력과 힘을 알되 그것이 과소평가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과장하여 나타냄을 두려워해야 한다.

옛날 중국에 유명한 목수가 살았다. ?어느 날 그 목수가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제(濟)나라에 공사를 하기 위해 가고 있는데 길을 가는 도중 토지묘(土地墓) 옆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를 한 그루 발견했다.

그런데 목수가 나무를 보고 본체도 아니하자 제자들이 궁금해서 물었다.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을 좇아 목공 일을 배운 이래로 저렇게 큰 나무를 본 적이 없는데, 어인 일로 구경조차 하지 않으시는지요?” ??스승은 이렇게 답했다.

??“저 나무는 전혀 쓸모없는 나무이니라. 배를 만들면 곧 가라앉아버릴 것이요. ?그릇을 만들면 견고치 못할 것이요. 기둥을 만들면 벌레만이 생길 것이니라. ?그렇듯 쓸모가 없는 나무라면 내가 봐서 무엇 하겠느냐?” ?그런데 그 날 밤, 목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낮에 보았던 그 커다란 나무가 나타나 목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지난 낮에 나를 향해 쓸모없는 나무라고 말하였는가? ?만약 쓸모 있는 나무였다면 벌써 목수인 그대가 나를 베어내고 잘라버렸을 것이 아니냐. ?그러하면 내가 오늘 날 구름에 닿을 수 있을 만큼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나무인 내 입장에서 보면 쓸모 있음은 곧 죽음을 얻는 것과 같다. ?쓸모없는 나무라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잘났다고 으스대면 얻어맞기 십상이다. 그저 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때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 이 삼체만 하지 않아도 아마 낭중지추는 될 것이다. ?재주가 완전히 갖춰지지도 않은 채 섣부르게 세상에 나서려다가는 제대로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나가 떨어지기 쉽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다. 때가 됐을 때 나타날 줄 아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다. 대권을 꿈꾸는 분들께서 귀담아 들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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