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원의 훈훈한 세상] 빡빡머리 스님한테 빗 1천개 판 사연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반야(般若)라는 말은 지혜(智慧)를 이른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이다. 불교에선 미혹을 끊고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을 말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대승불교 반야사상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으로 D본래 이름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그 뜻은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 풀이된다. ‘심’은 일반적으로 심장으로 번역되는데, 이 경전이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의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내 응축한 것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이 경은 수백년에 걸쳐 편찬된 반야경전의 중심사상을 260자로 함축시켜 서술해 가장 짧은 축에 든다. 한국불교의 모든 의식(儀式) 때 반드시 독송되고 있다. 이 경의 중심 사상은 공(空)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뜻에서 시작하여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주체·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산스크리트 본을 그대로 번역하면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현상일 수 있다”가 된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시시각각 변화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실체란 있을 수 없고, 또 변화하기 때문에 현상으로 나타나며, 중생은 그것을 존재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전에서 갈파한 ‘반야바라밀다’와 ‘공’은 우리의 참된 마음을 가리킨다. 걸림 없는 마음, 공포 없는 마음, 교만하지 않은 마음, 영원히 맑고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마음이며 부정(否定)을 겪어 그것을 넘어선 긍정(肯定)의 마음이다. 이 경전은 평화와 통일과 자유와 해탈이 모두 유래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반야심경의 끝에는 신비로운 진언(眞言)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가 있다. 예로부터 진언(眞言)은 그 신비성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고 하여 번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번역하면 “가세 가세 어서 가세 피안(彼岸)의 저 언덕으로!”라고 말할 수 있다.
대승(大乘)의 반야는 법(法, 진리)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서부터 비롯된다. 반야의 지혜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얻어진다. 결국 불교의 목적은 반야의 완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공(空)으로서 파악되고, 반야를 얻기 위해서는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타파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공’ 사상이 크게 부각된다. 결국 공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자연히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는 사상이 일관되게 전개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다시 반야의 몸으로 현실 속에 되돌아와서 보시라는 형태의 갖가지 자비를 베풀게 된다. 나아가 반야는 선정과 불도(佛道) 및 열반에 대한 여러 집착을 소멸시키고 성불할 수 있게 하는 주문으로까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지혜란 모든 사물의 존재방식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며 그것은 곧 공을 의미한다. 정견(正見)이 곧 지혜이며, 지혜가 곧 공이다. 공은 무(無)가 아니다. 공은 깨달아야 한다. 정견은 논리나 사유, 이해로써 아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논리, 생각, 사유, 분별로써는 접근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생들은 항상 생각하는 버릇으로 인해, 생각으로 깨닫고자 한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길, 반야의 길을 가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적선소’(積善梳)라는 말이 있다. ‘선을 쌓는 머리빗’이라는 말이다.
어떤 회사에서 영업부 지원자를 상대로 ‘나무로 만든 빗을 스님에게 팔아오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이 “머리 한 줌 없는 스님에게 어떻게 파느냐”며 포기했다. 세 사람이 남았다. 면접관이 말했다. “지금부터 열흘 동안 스님들에게 나무빗을 팔고 난 뒤 상황을 보고하세요” 열흘이 지나 세 사람이 돌아왔다. 이들의 판매 실적은 각각 빗 1개, 10개, 1000개였다.
면접관이 1개를 판 사람에게 어떻게 팔았느냐고 물어보자, “머리를 긁적거리는 스님에게 팔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0개를 판 사람에게 물으니 “불자들의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기 위해 절에 비치해 놓으라고 설득했지요”라고 답했다. 10개 판 사람은 1개판 사람보다는 확실히 접근방법이 달랐다.
그런데 1000개를 판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는 “열흘이 너무 짧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많이 팔릴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빗을 머리를 긁거나 단정히 하는 용도로 팔지 않았다. 그가 찾은 곳은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유명한 절의 주지스님을 찾았다.
주지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런 곳까지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부적과 같은 뜻 깊은 선물을 하면 어떨까요? 이 빗에다 스님의 필체로 ‘적선소’라는 글을 새겨주시면 아마 더 많은 신자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나무빗 1000개를 사서 신자에게 선물했고, 신자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수만개의 빗을 납품하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된다. 그야말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반야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렇게 원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凡夫)는 작은 선(善)에 걸리어 큰 선을 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작은 지혜에 걸려 큰 지혜를 얻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