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라프의 중동견문록②] 시리아 다마스커스, 어제와 오늘

시리아 지도

3300년 전 어느 아침,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 부근, 다마스커스 북쪽에 위치한 가데스에서 젊은 이집트 왕 람세스2세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지만 헷족에 수적 열세를 겪게 된다. 공격형 전차에서도 열세였고, 부상자 수도 많았다. 양측은 지지부진한 이 전투가 손실만 초래할 것이란 것을 깨닫고 일단 후퇴한 후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현명한 모와탈리스는 가데스 전투를 준비하는데 상당한 재물을 낭비하였지만 외교만이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그가 이전에 시티1세와의 평화를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라오에게 사신단을 보내어 평화를 제안하며 람세스2세의 용기를 칭송하고 “전쟁보다 평화가 좋다”는 말로 제안을 마무리지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곳이던 다마스커스

람세스2세는 가데스를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서약 없이 정전을 선택하려던 신하들을 소환하였다. 마침내 람세스2세 즉위 21년 (1259 BC)에 이 두 라이벌 간의 평화조약은 체결되어 가데스를 놓고 벌인 100여년 의 기나긴 갈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영구적인 정전 및 불가침에 대한 약속과 두 왕가 사이에 놓여진 이 도시의 국경 경계를 정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두 나라의 지도자들 간에는 메시지, 선물 및 사신을 주고 받는 우호적인 세대가 지속되었다. 가장 유명한 메시지 중 하나는 헷 황제가 람세스 2세에게 숙련된 외과의를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다른 기후를 맛볼 수 있는 이집트에서 아나톨리아까지의 여행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전쟁의 역사는 가고, 평화의 시간이 다가왔다. 두 나라의 화평은 가데스에서 멀지않은 알 쿼사르란 마을에 남게 되었는데 여기서 “차이는 사라지고 우호는 유지”된 경우이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영적 평안은 이웃들 간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장례의식에도 남아있다. 심지어 작명도 아주 유사하게 하여, 기독교인도 아이들 이름을 아메드나 무하마드로 지을 경우가 있다. 관용의 분위기 안에서, 죄를 용서하는 아시강을 바라보며 종교적 색채가 띠는 이름을 짓는 경우는 드물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다마스커스 시가지


역사 및 기억

필자가 방문한 셰이크 마크람 자로스의 집에서는 누가 무슬림이고 누가 기독교인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마치 알 쿼사르에 있는 모든 사람의 공동 생활의 세포와 평화 흐름을 가진 피가 아시강에 하나의 동맥을 이뤄 흐르는 것처럼 모든 손님에게 우호적이고 형제에게 대하듯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의 대화 중에 가데스는 전쟁과 평화의 상징으로 등장되곤 하였다.

그날 필자는 조상의 얼을 되살려 역사를 재발견하고 과거의 화합을 다시 기억하려는 국민의 열망을 시리아 정부가 채워주기를 바랐다. 이 나라 국민의 입장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잊혀졌던 지역에 어느 날 여행자들이 몰려들기를 바랐다. 이것이 이 지역민들이 바라보는 아시강과 포플러나무, 버드나무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았던 수 천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관찰이다.

봉건제도가 전혀 자리잡지 못했던 이 지역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불평등에 대한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서는 수년간의 가뭄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관대함의 전통을 가진, 돗자리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포도원 또는 살구, 사과, 호두, 무화과 과수원 또는 밀이나 감자 밭을 배회하는 왕자같이 행동하고 그의 땅의 소산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줄 수 있는 농부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위대한 시리아혁명의 한 장을 차지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와 프랑스 통치에 저항한 역사에 흥미를 느끼며 교과서와 신문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이에 관한 기록을 찾고 싶어한다.

엔지니어 무하마드 모힙 에딘(아부 하산)의 도서관에 들어가니, 퍼만스(오스만 제국 시절 쓰여진 왕정 법률)와 원고 더미 그리고 몇몇 신문과 잡지의 희귀하기만 한 첫 호가 필자를 맞이한다. 그가 태어난 마을, 4세기 넘게 지난 골목길에서 쌓인 수많은 책, 판본, 문서들에서 필자는 거의 길을 잃을 뻔 하였다. 그는 필자에게 가계도 한쪽을 붙들게 하고는 가데스 또는 그 인근에서 태어난 조상들의 출생지까지 뻗어있을 것 같은 다른 한 쪽을 가리켰다. 그 문서는 알 쿼사르의 출입 경계에서 일하고 레바논과의 국경, 요시아에서 들어오는 우편물을 받는 일을 맡았던 조상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아부 하산은 말했다. “150년 전 여기서 유일하게 글을 읽었던 사람이었던 시인 무하마드 왈리드 알 마스리(“알-마스리” 라는 성의 뜻은 이집트인이란 뜻)라는 조상이 쓴 문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오스만왕국의 병사로 와서 다른 사람들처럼 여기에 터전을 잡기로 했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 갔다. “국가문서 전시회에서 어떤 희귀문서를 보았는데, 그 문서는 하마의 주민들이 쓴 것으로 자신들이 아시강에 대한 독점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홈스 주민들이 강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시리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 두 도시가 서로 얼마나 앙숙인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다. 트렁크에 가득 채운 이동도서관을 움직이며 책과 문서를 자신의 개인도서관으로 옮기며 운전해가는 아부 하산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의 최근의 문서광적인 행동은 레바논에서 이루어졌는데, 80세 노인에게서 5천권의 도서관 장서를 사는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편집장으로 10년간 일했던 <알-아라비 매거진>은 창간호 8000권에 관한 권리를 포함한 10만권의 문서와 인쇄물을 보유한 아부 하산의 컬렉션에 대한 스페셜 기사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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