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라프의 중동견문록①] 시련 속 시리아 ‘3000년 전 그곳은···’

오론테스 강(River Orontes)에 도착한 순간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오론테스 강과 마주하자마자 강이 두 팔 벌려 당신을 안아준다는 느낌을 받을지 모른다. 강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대지와 장미 정원에 서 있노라면 꽃나무들의 합창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시리아와 레바논 북쪽 국경 지대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함께 흐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국경 지대에 시리아 정부가 심어놓은 지뢰와 총알이 가득하다. 시리아 국민들이 국경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진들을 보고 있다가 왜 저 아름다운 곳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다 오래 전 그곳에서 있었던 전쟁과 그 후의 평화조약이 뇌리를 스쳤는데 이 이야기를 하려면 2004년 여름으로 거슬러올라가야겠다.

그 해 여름, 필자는 이집트 신전 벽에 새겨진 카데시(Kadesh) 서사시를 읽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 근처 다마스커스 북쪽의 알 쿠사이르(Al Qusair) 마을에 잠깐 멈춰 섰다. 자연의 선물을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그 곳에서의 평화와 고요는 마치 폭풍 직전의 고요 같았는데 사실 내가 서 있던 그 곳은 지금으로부터?3400년 전?폭풍의 정가운데였다.

이집트 제18왕조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 사망 이후, 시리아 지역의 이집트 식민지들이 이집트로부터 분리 독립을 외치며 결사항전을 벌이거나 이집트를 떠나 당시 유프라테스에서 지중해 주변 시리아까지 세를 확장했던 미탄니 왕국과 결탁하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시리아를 공략할 수 밖에 없었는데, 기원전 1457년부터 시작해서 시리아를 17번이나 침공했다. 이 과정에서 미탄니를 유프라테스 바깥으로 쫓아버리며 이집트의 옛 영광을 되찾기도 했다. 그러자 바빌론, 아시리아, 히타이트의 왕들은 서둘러 화친조약을 맺고 외교적 노력을 강화했다.

투트모세 3세는 전형적인 이집트의 파라오였다. 그는 제국주의를 믿었으며 정복하는 것을 좋아하는 한편, 정의를 수호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반면 그의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유일신 사상을 따랐고 대외정책에 거의 신경 쓰지 않은 대신 국내의 종교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히타이트 제국은 이 틈을 타 다시 힘을 길러서 시리아 땅을 되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집트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투트모세 3세가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던 카데시(Kadesh)까지 차지하는 데에 이르렀다. 카데시의 호족들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 양쪽에서 이득을 챙겼는데 이집트의 파라오에게는 히타이트와 손을 잡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히타이트의 황제에게는 이집트의 영토를 빼앗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몇 년 뒤 투탄카톤(후에 투탄카멘으로 개명)이 왕위에 올랐으나 권좌에 오른지 9년만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홀로 남은 왕비 앙케세나멘은 히타이트 황제 수필룰리우마스에게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이집트로 보내 자신과 결혼시켜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게 된다.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수필룰리우마스는 편지의 내용을 믿지 않고 왕자를 보내는 대신 첩자를 보내 이집트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첩자가 염탐한 이집트는 앙케세나멘 왕비가 이야기한 그대로였고 이에 수필룰리우마스는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이집트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투탄카멘 왕의 장례를 맡은 책임자이자 이미 이집트의 실세였던 아이(Ay)는 히타이트 왕자 암살을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해 버린다.

히타이트 왕자의 암살로 인해 수필룰리우마스는 격노했고 시리아 지역의 이집트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양국은 서로에게 날선 적대감을 표출했고 람세스 2세가 등장하기 전까지 75년간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 유지됐다.

람세스 2세는 마법의 손을 가진 왕이었다. 누비아 사막을 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금광을 발견했고 그의 부하들이 목이 마르다고 하자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찾기도 했다. 그는 시도하는 것마다 다 성공했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그를 ‘기적의 사나이’라고 부른다.

그는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세련되게 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대규모 신전을 건축했으며 이집트의 옛 영광도 회복했다. 이런 그가 카데시를 되찾아올 생각을 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투트모세 4세 이후로 히타이트에게 빼앗긴 영토를 하나씩 찾아올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한편,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황제는 아모로 지역의 전열을 정비하고 카데시 지역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며 젊은 파라오에게 일격을 가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단결을 호소하며 전쟁에서 이길 경우 풍성한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카데시: 전쟁과 평화의 도시

그로부터 3400년 뒤, 필자가 도착한 카데시에는 도시의 북동쪽을 흐르는 오론테스 강 한편으로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옛날 카데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카데시를 천혜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남쪽으로 인공 수로를 팠을 것이다. 카데시는 비카(Biqaa) 지역과 맞닿아 있어서 정치적으로도, 또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좁고 험악한 해안을 건너지 않는 이상 모든 군대는 카데시 북동쪽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강의 동쪽 지류 부근에 앉아 보았다. 람세스 2세가 그의 부하들과 군대를 이끌고 앉아 있었을 바로 그곳이다. 젊은 지휘관은 쉽게 카데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특별히 히타이트로부터 도망친 2명의 탈영병이 히타이트의 황제가 북쪽 알레포에 있다고 토설한 후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부터 약 120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정찰대가 히타이트의 첩자를 붙잡아 자백을 받은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히타이트의 황제는 120마일이 아니라 바로 2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젊은 파라오가 새로 긴급 작전을 짜기도 전에 히타이트의 전차 군대가 카데시 평원을 넘어 그에게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집트 군대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이를 지켜보던 람세스 2세는 그의 방패를 집고는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서라고 고함을 질렀다. 내가 먼저 앞장서서 히타이트를 공격할 테니 모두 나를 따르라고 왕이 목소리를 높인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대하지 않았던 지원군이 아모로 해안선을 거쳐 도착했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람세스 2세의 군대와 나중에 도착한 지원군은 양쪽에서 히타이트를 치기 시작했고 이들은 거침없이 히타이트 군대를 밀고 들어갔다. 히타이트 황제는 히타이트가 밀리는 모습을 보고 대경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