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 큰스님의 깨달음, ‘시’로 말하다
지난해 가을 우리가 강원도 만해마을로 찾아가 그를 만나기 위해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민머리에 대담한 미소를 머금은 노승이 들어섰다. 그와의 악수에서 조오현이라는 사람의 면모가 드러났고, 그의 말에서는 ‘아득한 성자’의 신성함이 더해졌다.
이 현명한 노승은 마치 자신과 손님, 단둘만이 방에 있는 것처럼 개개인을 대했다.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그의 배려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터키, 튀니지, 모로코, 오만, 요르단, 이집트, 한국에서 온 손님들은 그에게 빠져들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 정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을 땐 그의 뛰어난 유머 감각이 빛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필자가 받았던 가장 큰 선물은 어르신들이 손주들에게 세뱃돈을 주듯 나눠줬던 지폐가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그의 시집이었다.
‘아득한 성자’는 오현 스님을 아랍권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하기 위해 필자가 아랍어로 번역하려는 시집의 제목이다. 영문으로는 고창수 박사가 이를 번역해 소개한 바 있다.
오현 스님의 시는 시집 서문에서 박철희?서강대 명예교수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시조에 속한다.?“시조는 한국 문학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닌 시의 갈래로, 고전시에서 유래돼 여러 시대에 걸쳐 한국인들에게 가장 적절하고 전통적인 시의 형태로 발전 계승돼 왔다.”
박 교수는 “이는 한국 고전시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조 형식은 한국 전통 민요나 향가의 발전 또는 변형의 결과로 보인다. 이들은 두 행이 짝을 이룬 둘에서 다섯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행은 주로 네 개의 어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절은 셋 또는 넷, 다섯 개의 음절로 구성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향가는 모두 10행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현 스님의 시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것은 필자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는 독자와 함께 날며 하늘의 진실에 닿고, 사랑을 믿고, 바다와 이야기하고,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삶의 비밀들이 밝혀지도록 이끈다.
시의 길이는 매우 짧지만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때때로 그가 이런저런 생각들을 두번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그러하듯 장면은 반복되지 않으며 항상 다르다.
“시가 말할 때, 산문은 침묵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대로 필자는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려 한다. 다만 ‘아득한 성자’에 실린, 지구에 사랑이 싹트게 하는 지혜의 빗줄기를 내리는 구름과 같은 그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허수아비
새 떼가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사람이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거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남의 것이거나 내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하지만
손 흔들어주고 숨 돌리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아지랑이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원문은 아시아엔(The AsiaN) 영문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www.theasian.asia/archives/57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