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제·전농동·잼배옥·백송·함민복 시 ‘눈물은 왜 짠가’와 연관되는 이 음식은?

설렁탕의 유래에 관한 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서는 세종이 선농단에서 친경을 할 때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친경 때에 썼던 소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서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설렁탕이 된 유래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설은 몽고에서 고기를 맹물에 끓이는 조리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시아엔=박명윤 서울대보건학박사회 고문, 대한보건협회 자문위원] “대한민국 농사의 시작, 희망의 씨앗을 뿌려라!” 지난 4월30일 선농단(先農壇)에서 열린 ‘2015 선농대제’의 구호다. ‘선농단’에서 매년 곡우(穀雨, 4월20일)를 전후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선농제를 올린다. 한편 우리가 즐겨먹는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유래했다.

선농단은 선농제를 지내던 제단이며 크기는 사방 4m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하여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농(先農)의 기원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17년(BC 41년) 왕과 왕비가 육부를 순행하면서 농사와 잠사(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하였다고 한다. 즉 입춘 뒤 첫 해일(亥日)에 명활성의 남쪽 웅살국에서 선농제를 지냈으며, 입하 뒤 해일에는 산원에서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시대 성종 2년(983년) 정월에 왕이 원구단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籍田)을 갈며 신농에게 제사하고 후직을 배향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태조 때부터 역대 임금들은 선농단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를 지내고 적전에서 친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것을 왕이 친히 밭을 간다고 해서 친경례(親耕禮)라고 하였다. 조선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4년(1910년)에도 행하였다.

동적전(東籍田)은 서울 동쪽 교외 전농동(典農洞)에 있었고 서적전(西籍田)은 개성 동쪽 교외 전농동에 있었다. 제사용 곡식을 저장한 서울 전농동 동적전에는 필분각과 창고 등이 있었고, 개성 전농동 서적전에는 형향각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생산된 곡물은 종묘 제사에 사용하였으며, 서적전 생산 곡물은 조정에서 봉행하는 제사에 사용하였다.

선농제 행사는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 폐지되었다. 해방 후 1979년부터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유지들이 ‘선농단 친목회’를 구성하여 선인들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선농단에서 제사를 올리다가 1992년부터 동대문구청과 선농대제보존위원회가 함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

선농단은 1972년부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보존돼 오다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국가 지정문화재(사적 제436호)로 승격되어 보존되고 있다. 선농단이 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무학로 44길 38(제기동 274-1번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선농대제’ 행사를 서울시 동대문구가 주관하여 거행하고 있다.

동대문구에서는 2008년부터 선농단의 정비와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2012년 문화재위원회와 도시공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본격적인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선농단은 고증을 받아 옛 모습으로 정비하였으며,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선농단 지하에 건립하여 2015년 선농대제와 함께 개관했다.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제례의식과 친경의식에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궁중의 제례와 친경문화를 배우는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선농대제의 시작인 제례행렬이 오전 10시 취타대를 시작으로 호위무사, 제관 등 100여명이 행렬단으로 구성돼 임금의 행차를 재현한다. ‘임금’ 역을 동대문구청장이 맡는다. 선농단에 도착한 제례행렬은 오전 10시30분부터 선농단보존회의 집례 아래 약 70분간 선농제례를 봉행한다. 임금과 제관들은 선농단에서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다.

이후 ‘설렁탕’ 2000인분을 나누면서 설렁탕의 유래와 임금의 마음을 되새겨보는 ‘설렁탕 재현행사’가 펼쳐졌다. 임금이 선농단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후 왕을 비롯한 조정 중신은 서민들과 함께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의식을 행한 뒤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소를 잡아 끓인 국과 밥을 하사했다. 이를 선농단에서 임금이 내렸다 하여 ‘선농탕’이라 했고 오늘날 ‘설렁탕’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설렁탕의 유래에 관한 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에서는 세종이 선농단에서 친경을 할 때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친경 때에 썼던 소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서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설렁탕이 된 유래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설은 몽고에서 고기를 맹물에 끓이는 조리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설렁탕은 쇠머리, 쇠족, 쇠고기, 뼈, 내장 등을 모두 함께 넣고 장시간 백숙으로 푹 고아서 만든 곰국으로 국물이 뽀얗고 맛이 농후하다 하여 설농탕(雪濃湯)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설렁탕’이란 단어가 명확하게 등장하는 것은 1890년에 발간된 <언더우드 한영사전>이 처음이다. 한영사전에서 ‘셜넝탕(설렁탕)’을 고기국물(a kind of meat soup)로 소개하고 있다. 같은 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곰(곰탕)’에도 설렁탕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다.

서울의 명물음식인 설렁탕은 일찍부터 대중음식으로 시판되었다. 1924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서울에만 100여개 설렁탕집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설렁탕 음식점은 1904년 개업한 서울 종로 ‘이문설농탕’이다. 농림수산부의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에 나와 있다.

설렁탕 음식점에는 항상 2-3젅개의 큰 무쇠 솥에 설렁탕이 끓고 있으며, 그 옆에는 설렁탕을 골 때에 넣었던 소의 여러 부위를 부위별로 편육으로 썰어서 채반에 담아둔다. 손님이 설렁탕을 주문하면 뚝배기에 밥을 담고 뜨거운 국물로 토렴하여 밥을 데운다. 그 다음에 국수사리를 얹고 채반에 있는 편육을 집어넣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듬뿍 부어 내준다. 그러면 손님은 먹을 때 소금, 후춧가루, 다진 파 등을 넣어 간을 맞춘 후, 잘 익은 깍두기와 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설렁탕은 고단백의 건강식으로 알려져 있다.

설렁탕이 보편화된 외식메뉴이기에 맛과 개성으로 오랜 기간 고객 사랑을 받는 전통의 명가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로의 ‘이문설농탕’은 현대화된 진한 국물과는 다르게 심심할 정도로 연한 국물에 머릿고기를 넣는 것이 특징이다. 서소문의 ‘잼배옥’은 각종 잡뼈와 고기, 내장이 다양하게 들어가 먹고 나면 입안이 끈적거릴 정도로 진하고 묵직한 국물이 특징이다. 경복궁 인근 ‘백송’은 진한 맛과 깔끔한 맛의 밸런스가 잘 맞는 국물과 양질의 고기 부위와 함께 들어가는 큼직한 도가니가 특징이다.

소(牛)의 조상은 들소(原牛)이며, 기원전 5천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농경유적에서 가축화된 우골(牛骨)이 발견되었다. 인간이 쇠고기를 먹기 시작한 역사도 오래되며, 중국에서는 기원전 2천년경에 소가 희생물로 신인공식(神人共食)이 되었고 기원전 700년경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쇠고기 식용 기록들이 있다. 쇠고기는 수육(獸肉) 중에서 맛이 좋고 영양가가 높아 사람들이 애호한다.

쇠고기는 20세기 이전에는 서양이나 동양에서 귀한 식재료였다. 귀한 쇠고기를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은 고기를 끓인 국물이 유일하다. 이에 설렁탕, 곰탕, 국밥, 해장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고기탕’ 문화가 생겼다. 명확한 기준은 아니지만 뼈가 중심이 되어 하얗고 탁한 국물이면 설렁탕, 뼈보다는 내장이나 살에서 우려내 맑은 국물이면 곰탕으로 구분한다.

설렁탕은 잘사는 사람이든 못사는 사람이든 누구나 즐겨 먹는 음식이다. 설렁탕 한 그릇에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주인공 김 첨지는 아내의 사망을 모르는 상황에서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서 집으로 간다. 시인 함민복(1962~)의 ‘눈물은 왜 짠가’는 설렁탕집을 배경으로 하여 모자 사이에 형성되는 애틋한 사랑과, 설렁탕집 주인아저씨의 따뜻한 인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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