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우리들의 만남은 무엇이고 이 만남을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까 늘 생각하게 된다. 원불교의 성가(聖歌) 중에 ‘운수의 정(情)’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도 좋고 곡도 너무 아름다워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 성가 115장을 즐겨부른다. 그 노래의 가사를 한 번 음미해 본다.

“우리 일찍 영산회상(靈山會上)/ 운형수제(雲兄水弟) 아니던가/ 오래 두고 그리던 이를/ 만난 듯함 무슨 일고/ 말없이 마주 앉은 정이/ 삼천년을 더듬네”

구름과 비의 만남은 꼭 형제와 같이 없으면 안 되는 만남이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같은 만남이다. 독일의 문학자 한스 카롯사는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도반 동지간의 만남 등 많은 사람과의 만남만큼 좋은 인연은 없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을 통해서 결정된다. 여자는 좋은 남편은 만나야 행복하고 남자는 좋은 아내를 만나야 행복하다. 학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실력이 생기고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만나야 가르치는 보람을 누리게 된다.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잘 만나야 한다. 씨앗은 땅을 잘 만나야 하고 땅은 씨앗을 잘 만나야 한다.

백성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고 지도자는 백성을 잘 만나야 훌륭한 인물이 된다. 인생에서 만남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연한 만남이든 필연적 만남이든 만남은 중요하다. 인생의 변화는 만남을 통해 시작된다.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역사도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만남을 통하여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 속에서 신뢰와 사랑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자연과 사물의 만남 역시 그와 못지않게 소중하다.

만남은 진리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 선물 안에는 인간의 몫이 들어 있다. 소중함과 성실함으로 만남의 숲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만남은 가꾸지 않으면 황폐해지기 쉽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고 아낌없이 베풀고 인정해 주는 만남의 기본철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그런 만남에 3가지 종류가 있다. 생선 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이다.

첫째, 생선 같은 만남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만남이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게 되는 만남,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다. 이런 만남이 상극의 악연이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은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이다. 꽃은 10일을 넘지 못한다. 꽃과 같은 사랑이 풋사랑이다. 금방 실증을 느끼는 인연이다. 헤어지자니 지나온 세월이 아깝고, 참고 살자니 힘들어 마치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다. 그러니까 선연과 악연의 중간 쯤 되는 인연이다. 우리는 이를 업연(業緣)이라 부른다.

셋째, 손수건 같은 만남은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한다.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이다. 혈연이나 우리 ‘덕화만발’ 가족 같은 법연(法緣)의 만남은 손수건 같은 만남이 되어야 한다. 상생의 선연이다.

그렇다고 인연도 너무 욕심 부리고 집착하면 안 된다. 물맛 같은 인연이 가장 좋은 것이다. 옆에 있으면 좋고, 가도 억지로 잡지 않는다.

개미와 매미가 살았다. 개미는 눈만 뜨면 열심히 일했고 매미는 눈만 뜨면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어느 날 둘은 뽕나무 위에서 만났다. “개미야, 너 무엇 하러 여기에 왔니?” “나는 오디를 가져가려고 왔지. 너는?” “나는 뽕나무를 찬양하러 왔지.” 개미가 혀를 찼다. “불쌍한 매미야, 정신 좀 차려라. 이 바쁜 세상에 찬양이 다 뭐냐? 오디나 물어 나르지.” “나는 네가 더 불쌍하다. 먹을 만큼만 가지면 됐지. 그렇게 모아서 뭐하니?” “많이 가지는 것이 힘이야.” “그것은 함정이야. 지나치게 소유하면 곳간이 오히려 너를 부리게 될 걸.” 개미는 화를 내며 떠나고 말았다.

개미는 계속해서 오디를 모았다. 쉴 틈도 없었다. 곳간을 짓고 또 지었다. 그러나 매미는 그 날의 먹이로 족했다. 작은 이슬 한 모금에도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을 매미는 노래로 옮겼다. 가을이 오기 전에 매미는 죽었다. 속의 것을 모두 노래로 다 토해버린 매미는 한 꺼풀 남은 마지막 허물마저도 훌훌 날려버리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일생을 모으기만 한 개미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많은 곳간을 남겨 두고 가는 것이 원통했고 자기 삶을 자기답게 살지 못한 것이 그때서야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숱한 곳간을 두고 개미의 해는 지고 말았다.

인연도 너무 욕심을 부리면 상처를 입기 쉽다. 그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애착과 탐착(貪着) 그리고 원착(怨着)을 여의여야 한다. 그걸 삼독심(三毒心)이라 하고 마음공부를 통한 담담한 마음을 길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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